[부고] 서호영 동지의 영면을 빕니다

서호영(5.18민주유공자)님이 
2012. 06. 24(일) 새벽, 별세하셨습니다.

 

서호영님은 1980년 5월 당시 21세의 청년으로 광주항쟁에 참여하여 5월 27일 새벽까지 광주도청에 남아 항쟁의 뜻과 진실을 마지막까지 지켜내고자 하였습니다.

 

5월 27일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의해 도청에서 상무대 영창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징집되어 군대에서도 가혹행위를 당했습니다.

 

고인은 항쟁 참여로 겪게 된 정신적,육체적 상처가 심해지면서 여러 차례 치료감호(시설)를 받아야했고 이로 인해 사회,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으며 이는 본인과 가족의 생활고와 고통으로 이어졌습니다.

 

1980년 이후 지금까지 5.18항쟁 참여로 인해 고통스런 삶을 겪어내야했던 고인은 그 혹독한 과정 중에도 5.18항쟁 참여자로서의 자긍심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고 전두환 노태우 신군부의 죄악을 결코 용서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으며 5.18의 진실을 알려야한다며 틈만 나면 주위에 이를 고발하고 증언하고자 하였습니다.  

 

광주항쟁 참여 후 받은 정신적, 육체적 상처와 사회적 냉대와 몰이해를 온 몸으로 겪어내며 끝끝내 신군부의 폭압에 맞섰던 고인은 그 비통한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고인은 물론이고 그동안 가족들이 함께 겪은 고통과 고초가 너무 커...무어라 위로의 말을 드리는 것조차 힘듭니다. 

 

비통함과 울분을 삼키고계신 가족들에게 모쪼록 동지들의 위로와 격려가 함께 하기를 기원하며 삼가 고인의 평화와 안식을 마음모아 빕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 빈    소 : 강동성심병원 장례식장 / 02-470-1692 /강동역(5호선)2번 출구

 

★ 발인일시 : 2012. 06. 26. (화) 오전 5시 

 

★ 장    지 : 국립 5.18민주묘지

 

** 연락 전화번호 : 서영석 (010-9791-0500) 

추모글 모음

5・18 추모의 글

순서 성명 추모의 글
38 이하 *
2000년대에 태어난 저에게는 조선시대 만큼 옛날로 느껴졌던 역사였습니다. 역사시간에 그저 시험을 위해서만 의미 없이 날짜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외우고 시험이 끝나면 까먹기 일쑤였죠. 하지만 오늘 5.18을 추모하며 몇 가지 영상을 보니 과거의 제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5.18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의 제가 민주 항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당시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오늘의 제가,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해주신 분들의 노력을 잊지 않겠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하루일 것 같습니다.
37 최연 * 민주화를 위한 희생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36 김민 * 5.18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35 양희 *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1980.05.20 전남매일신문사장 귀하
34 노무 * 빨갱이 폭동
33 노무 *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
32 한기 *
5월 그날이 다시 오기를 40번
그날 아스팔트에 쓰러진 동료들
1981년 첫해 추모제의 비통했던 기억
또 가슴이 멍멍해진다.
평생을 잊지 못하고 살고 있다.


31 한기 *
5월 그날이 다시 오기를 40번
그날 아스팔트에 쓰러진 동료들
1981년 첫해 추모제의 비통했던 기억
또 가슴이 멍멍해진다.
평생을 잊지 못하고 살고 있다.


30 한기 *
5월 그날이 다시 오기를 40번
그날 아스팔트에 쓰러진 동료들
1981년 첫해 추모제의 비통했던 기억
또 가슴이 멍멍해진다.
평생을 잊지 못하고 살고 있다.


29 이 *
1980년 5월 17일, 종로에는 술취한듯한 군인들이 수 많은 트럭을 타고 군가를 부르며 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광주로 가는 군인들로 짐작 됩니다. 그후에 미국에 살며 한국을 그리며 광주사태에 막말을 하는 자들을 저주하며 40년을 살았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전두환과 그 잔당을 처벌하고 나라를 바로 세울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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