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개혁상징 월주 스님 ‘열반’

[중앙일보] 백성호 기자 입력 2021.07.23 00:03

80·94년 두 차례 조계종 총무원장
전두환 신군부 맞서다 미국 유배도
불교 자주화, 종단 민주화 틀 세워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도 이끌어

 

“토끼에게는 뿔이 없다. 귀만 있다. 세상을 떠나 깨달음을 구하는 것도 이와 같다.”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을 두 차례 역임하고, 지구촌공생회 등을 통해 대사회 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던 월주 스님이 22일 오전 9시45분 전북 김제 금산사에서 입적했다. 법랍 67세, 세수 87세. 올해 폐렴 등으로 동국대 일산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오던 고인은 이날 새벽 조실로 있는 금산사로 옮겨진 뒤 눈을 감았다.
 
월주 스님은 1980년과 94년 두 차례에 걸쳐 제17대, 제28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했다. 고인의 개인사는 조계종단의 개혁사와 맥을 같이한다. 고인은 1980년 조계종 총무원장에 당선됐다. 그해 10월 신군부에 의해 10·27 법란이 발생했다. 신군부는 그에게 종단 명의로 전두환 지지 성명을 내라고 했다.
 

종단 명의로 낼 것을 거부하자 이번에는 ‘총무원장 송월주’ 명의로 내라고 했다. 이번에도 거부했더니 서빙고 보안실로 데리고 갔다. 월주 스님은 거기서 23일간 고초를 겪었다. 당시 신군부에 비협조적인 조계종단의 와해를 노린 작전명이 ‘45계획’이었다. 조계사의 주소가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 45번지였기 때문이다.
 
결국 월주 스님은 미국으로 3년간 유배 생활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1994년 12월, 꼬박 14년 만에 다시 총무원장이 됐다. 조계종이 정치승에 의한 장기집권 음모로 몸살을 앓을 때였다. 종단의 개혁세력이 월주 스님을 지지했다. 고인은 불교 자주화, 종단 운영 민주화 등을 앞세우며 ‘깨사(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전개했다. 또 총무원장 3선 금지 제도를 마련해 정치승에 의한 장기집권 시도를 제도적으로 차단했다.
 
조계종단에서는 당시 체제를 ‘개혁 종단’이라 부른다. 그 중심에 월주 스님이 있었다. 지금도 “조계종단사는 송월주 스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만큼 조계종의 개혁사에서 고인은 큰 역할을 했다.
 

월주 스님은 불교의 울타리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당시 가톨릭의 김수환 추기경, 개신교의 강원용 목사와 함께 고인은 ‘종교 지도자 삼총사’로 불렸다. 생전에 고인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세 사람 중 누구도 자기 종교의 우월성을 말하지 않았다. 단지 종교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했다”며 “그렇지 못할 때 종교는 국민과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게 된다”고 회고한 바 있다. 월주 스님은 이들과 20년 가까이 친분을 나누며 우리 사회와 국가의 문제를 의논하며 목소리를 냈다.
 
월주 스님은 1998년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깨사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시민사회운동을 전개했다. 경실련과 불교인권위원회의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고, 국제구호 NGO ‘지구촌 공생회’와 함께 일하는 재단, 위안부 할머니들의 쉼터 ‘나눔의집’ 등을 설립해 이사장을 맡았다. 캄보디아를 비롯한 빈곤 국가 5개국에 2000개가 훨씬 넘는 우물을 팠고, 네팔과 라오스 등 8개국에서 60개가 넘는 학교를 준공했다.
 
생전에 월주 스님에게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를 물은 적이 있다. 월주 스님은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아무리 고관대작이라 해도 만족하지 않으면 불행하다”며 “나는 부족하다. 더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만 나는 행복하다. 내가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월주 스님은 또 수행과 자비를 둘로 나누지 않았다. “수행하면서 자비를 베풀고, 자비행을 하면서 또 수행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걸 자신의 삶으로 몸소 보여주었다.
 
분향소는 김제 금산사 처영문화기념관에 마련된다. 장례는 종단장으로 26일까지 5일장으로 치러진다. 영결식은 26일 오전 10시에 거행하며, 같은 날 금산사 연화대에서 다비식을 엄수할 예정이다.

[출처: 중앙일보] 조계종 개혁상징 월주 스님 ‘열반’ - 중앙일보 (joins.com)

 

 

추모글 모음

5・18 추모의 글

순서 성명 추모의 글
153 ㄱㅅ * 희생이 헛되이 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152 이영 * 기억하겠습니다.
151 ㄱㅈ * 희생당한 시민분들이 정말 멋지네요
150 강태 * 5.18 그날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149 나만 *
중학교 1학년 막 입학한 후였다.
갑자기 학교 등교하지 말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는 학교 안가니 무조건 좋았다.
먼 거리 비포장 자갈길을 자전거로 통학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광주에 폭동이 일었다고 들었다.

518이 끝나고 난 후 분실한 총기를 찾는다며 수업을 매번 빠뜨리고 전교생이 동원되어
강변 갈대 숲을 뒤지면서 총기를 찾아다녔다.
얼마 후 시내 남녀 중고등학생들 모두를 동원하여 대로변 양옆에 도열하게 한 후 검은 차가 지나가면 손을 열렬히 흔들라고 교육을 받았다.
한참 후 검은 차 몇대가 지나가는데 우리는 북한 보신박수 수준과 열광적인 환영식을 강요받았다.
어린 마음에도 더럽게 기분이 나빴다.
3년 후 광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입학하자 마자 최루가스로 범벅이 된 대학 정문을 지나 학교를 드나들었다.
전경들이 대학 내로 진입하여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끌고가던 시절이었다.
대자보를 열심히 읽었다.
뭔가 이 사회가 정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처음에는 어렴풋이, 1년이 지나자 518때 공수부대의 학살 장면, 당시 폭도라던 시민들 사이에 한 건의 절도사건도 없었음을 일상적으로 사진으로, 그리고 몰래 돌려보는 518 항쟁 관련 유인물들과 대자보를 통해 볼 수 있었다. 그 때 정말 이 나라는 혁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두환은 반성과 사과 한 번 없이 7년 내내 기세등등했다.
518기념일이 되면 망월동 입구에서 전경들이 닭장차를 대기시키고 무조건 체포하여 버스에 실어 교통수단이 없는 먼 오지에 버려두곤 했다. 그걸 피하기 위해 3KM여 정도를 더 우회하여 망월동 묘지를 참배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2학년 때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하모니커를 불었는데 당일 시위한걸 깜박하고 하모니커를 연주하면서 길게 들이마신 후 일주일동안 목에서 피가래가 계속 나와 수업을 받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일주일 계속된 피가래 증상 이후 지금까지 30년이 넘게 건조한 계절이나 여름에 에어컨을 틀면 물병을 들고 산다. 그렇지 않으면 사래 들려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이다.

다시 오늘 518을 맞는다.
윤석열이라는 희대의 정치검사와 그의 졸개들이 이제 국민 여론은 아예 깡그리 무시하고 법도 무시하면서 노골적으로 법위에 군림하는 정치를 하고 있다.

어제 윤석열이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을 만들어 엄단하겠다고 했다.
야 윤석열 이 더러운 정치검사야,
네 마누라 김건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수사 이따위로 뭉개면서 또 제2의 채널A사건 만들어 유시민 같은 정적 제거하려고 기도하고 있나?
이런 더러운 놈들이 공정과 상식과 법과 원칙을 입에 올리는 이 참담한 현실,
절대 그대로 지켜볼 수 없다.
제주의 4.3도 419 혁명도 80년 광주항쟁도, 87년 노동자 대투쟁도 여전히 완성되지 못하였다.
이번 봄에는 멀어도 광주에 꼭 다녀와야겠다.
들리는 길에 노무현 대통령님의 고향도 꼭 들러봐야겠다.

148 이문 *
잊지 않겠습니다! 책임자 처벌뿐만 아니라, 민주화를 위해 희생하신 모든 분들과 그 가족들 위한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촉구합니다!
147 나현 * 5.18 민주화운동 42주년
임을 위한 행진곡~함께
146 김석 * 그날을 잊지않으며 오늘의 태양과 하늘에 태그기가 펄락일수 있는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가합니다.
145 양 *

43여년의 기나긴 모진 비바람 속에도 영원히 가슴에 영롱한 의로움의 넋은 계승되고 온전한 믿음의 계승으로 살아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불상히 여기신 먼저가신 선대분들의 민주화운동을 잊지 않고 기억한 한분 한분의 사랑 감사와 경외를 드립니다.
삼가 하늘의 영면은 살아 있는 한분 한분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영원한 사랑 입니다.
다시 기억한 민주화의 법:유신독재자 재산환수법+군부독재자 재산환수법+친일혈족의재산환수법= '통합적 국가적 야만의 폭언폭력의 학대자들의 재산 환수법''다르면다를수록 아름답습니다'.
1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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