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2008년/글]대상 - 황교정(목동고1)
5˙18민중항쟁기념 제4회 서울청소년 백일장 및 사진대회
백일장부문 “대상”
그땐 그랬지
황교정 목동고등학교 1학년
“죽기 전에 고향에 가보고 싶구나.”
나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미국에서 한국의 광주, 할아버지의 고향인 광주에 오게 되었다.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내내 식은땀을 흘리시며 긴장하시던 할아버지는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택시 잡아라.” 라며 재촉하셨다. 할아버지께서 어디를 가시려고 그러는지는 몰랐지만 그 눈이 왠지 모를 물기에 젖어있는 것 같아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어느 묘역 이였다.
성큼성큼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가시는 할아버지를 뒤따라 간 곳은 “김창수의 묘”라고 새긴 비석이 있는 오래되어 보이는 묘 앞 이였다. 도착한 뒤로 계속 말이 없으시던 할아버지께서 입을 여신 것은 20여분이 흘렀을 쯤 이였다.
“내가 과거에, 그니까 그게 내 나이 열아홉 때 쯤 일거야 그 때, 죽은 내 마누라, 그니까 네 할미를 만났지. 그 때는 나도 학생, 네 할미도 학생이었는데 교복을 입고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내린 모습이 어찌나 예쁘고 곱든지 첫 눈에 반해버려 허구헌 날 뒤꽁무니를 쫓아다녔지. 그러다 스무 두 어살 때 즈음인가 양가 집안에 허락을 받고 결혼하게 되었지. 결혼하고 한 일년 됐을 때 니 애비가 태어나고 그 다음 다음 해에 낳은 놈이 있었는데 바로 네 작은 애비, 창수 놈이였어. 몸이 병약해 방에서 책 읽고 놀던 니 애비에 비해 건강하게 자라서 공 차고 놀던 놈이라 기특했었는데....... 그 땐 누가 알았나. 부모보다 먼저 가는 못된 놈이 될지.......
창수가 국민 학교를 거쳐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였지. 광주에서 기자로 활동하던 내가 신문에 실을 기사를 쓰고 있는데 선배가 와서 하는 말이 ‘요즘 새 정부에서 군대를 이동시킨다는 소문이 돌던데,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으니까 주의 깊게 살펴봐라“ 라는 거야. 그래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 갔어. 그 때가 한창 전국 방방곡곡에서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민주화의 봄, 서울의 봄” 이라 불리 우는 민주화 운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을 때였거든.
그데 한 3일 지났을까 정부에서 비상 계엄령을 내리더니 그 다음날 갑자기 개미 떼 같이 군인들이 떼 지어서 탱크니 뭐니 몰고 내려와서 시위하는 학생들이랑 길에 있던 멀쩡한 젊은 시민들을 무지막지하게 때리기 시작하는 했다는 거야. 얼른 카메라랑 다 챙겨서 거리에 나가보니까 사람들 옷을 벗겨서 속옷차림으로 모아놓고 때리질 않나 끌고 가질 않나. 하여튼 사람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폭력을 당하니까 잠깐 도망쳤다가 주변 사람들이 다치는 모습을 보고 다시 시위를 시작했어. 그리고 그 다음날 광주에 금남로라고 큰 길이 있거든. 거기에 모여서 그 전날 당한 폭력에 시민들이 시위를 했어. 그러니까 군인들이 어제보다 더 심하고 잔인한 구타를 하는 거야. 이 번에는 노인들도 패고 여자들도 패고 정말 길거리에 멀쩡한 사람이 없었어.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대학생들도 다쳤지만 고등학생들이 다쳤다는 거야. 군인들이 눈에 뵈는 게 없이 무조건 보이는 사람들을 때리니까 이 사람이 고등학생인지 대학생인지 구별할 길이 있나....... 한바탕 거리에서 군인들과 시민들의 접전 아닌 접전이 끝나고 사진을 찍는데 길에는 부모를 잃고 우는 아이, 다친 친구를 몰래 데리고 도망치려는 학생들, 머리가 깨져서 피 흘리고 팔이 부러지고 다리가 부러져 죽어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였어. 정말 사람이 그렇게 사람들을 죽이고 팰 수 있다는 사실을 이 때 알았어. 당장 이 사실을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온 나라에 알려야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곧장 내가 몸담고 있던 신문사에 가서 기사를 쓰고 상사한테 제출했어.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내가 기대했던 것이 아닌 정반대의 반응이었어. 이런 기사를 내면 안 된다고, 잡혀가 고문당하고 싶지 않으면 당장 필름을 없애고 입 다물고 있으라고. 난 기사를 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집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내 아내와 아들 두 아들 놈들이 생각나 할 수없이 굴복할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어. 골목길을 지나가는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난 낯익은 소리에 지나온 골목길을 다시 보는데 글쎄 내 둘째 아들놈, 창수가 왠 피투성이의 남자아이를 안고 숨죽여 울고 있대. 놀라서 다가가 보니까 그 남자아이는 창수가 제일 친하게 지내고 매번 같은 학교가 됐다고 기뻐하던 민수였어. 이미 숨이 멈춘지 오래 되어 보이는 그 아이는 다리가 부러졌는지 누워있는데도 다리가 꺾여있고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굳어있었어. 창수가 울다가 인기척을 들었는지 겁에 질리고 분노에 차서 빨갛게 변해버린 눈으로 날 올려다보고는 “아버지.......아버지, 아버지” 라고 나를 부르더군. 난 가만히 안아주었어. 내가 친구를 잃고 울고 있는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안아주는 것뿐이더군. 내 품안에 안긴 아이가 계속 말을 이었어. “아버지, 왜 죄 없는 내 친구가 죽어야 합니까? 왜요? 내 친구는 그냥....... 그냥 가게에 가던 길이었어요. 할머니가 좋아하는 과자랑 군것질 거리 산다고 용돈 받아서 가던 길이였다 구요. 그런 애를 정말 개 패듯 팼어요. 그 두꺼운 몽둥이로 머리든 팔이든 다리든.......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어요?” 나는 더 꼭 안아주었어. “민수야.......민수야.......” 라는 아이의 중얼거림은 내게 어찌나 슬프고 한이 맺혔던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아. 가끔 이 놈 꿈을 꾸면 이 소리가 귀에서 맴돌아. “민수야, 민수야”라는 말소리가.......
그렇게 두어 시간을 그 곳에서 부둥켜안고 있다가 언제 들어 닥칠지 모르는 군인들이 생각나 민수의 시체를 업고 집으로 갔어. 놀라는 가족들을 지나쳐서 시체를 사랑방에 뉘여 놓고 민수 어머니를 모셔왔지. 쓰러져 가는 사글셋방에 간신히 사는 민수네 가족이 장사를 지낼 수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 집에서 지내게 하려고 했었어. 그런데 민수의 시체를 본 민수 어머니가 처음에 대성통곡을 하다가 나중에 진정이 되니까 시기가 시기인 만큼 그냥 근처 산에다가 묻고 서울로 올라가겠다 하더라고. 병 때문에 죽은 남편 대신 가장 노릇을 하던 아들이 죽었으니 서울이라도 올라가 품팔이라도 하겠다고. 그 때 내가 본 민수 어머니는 정말 남자인 나보다 강인해 보였다. 민수를 묻어 주는 건 나랑 창수가 했어. 비닐에 시체를 싸서 땅을 깊숙이 파서 묻었지. 비닐에 시체를 싸다니 지금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땐 공수놈 들의 눈을 피해야했어. 그래, 그땐 그랬지.
그 다음날 아침에 그 전날 밤새 불이 켜져 있던 창수 방에 들어가 보니 창수는 없고 책상에 편지만 있던 거야. 뭐지 하면서 읽어본 편지에는 정말 하룻밤을 되돌리고 싶은 내용이었어. 부모님 전상서 라고 쓴 편지에는 민수의 죽음을 보고 죄 없는 시민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참을 수가 없어 자신도 시위에 나간다는 만약 죽게 된다면 부모님보다 먼저 가게 되어 죄송하다는 내용이 담겨있었어. 편지를 보고나니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이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무조건 시위가 진행되고 있는 광장에 헐레벌떡 달려 나갔지. 그런데 민수를 찾다보니까 맨 앞줄에 교복을 입고 선창을 외치는 놈이 누군가 했더니 바로 창수놈 인거야. 그리고 공수 놈들은 그 앞에 조금 떨어져서 일렬로 서있고. ‘이놈아, 이 놈 창수야.......’ 난 외쳤지만 맨 앞에 있는 아이에게 들릴 일은 없었지. 아니 들렸어도 돌아보지 않았을 거야. 작정하고 나갔으니까. 그래도 지켜만 보자는 생각에 뒤에서 보고 있었는데 한 12시 반 정도 됐을까, 도청 스피커에서 죽음의 전주곡 같은 애국가가 흘러나오더라고. 그 애국가를 듣는데 왜 그렇게 소름이 끼치던지. 평소와 같은 애국가였는데 말이야. 그리고 애국가가 끝나는데 갑자기 콩 볶는 듯한 타당 타당 하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그 많던 사람들이 쓰러지고 있는 거야. 순간 왜 그렇게 소름이 끼쳤는지 알겠더라고. 맨 앞에 서있던 내 아들 창수가 쓰러져가는 모습을 보게 됐거든. 온 몸에 총알을 다 박고 쓰러지는데 앞으로 달려 나가려는 몸을 뒤에서 알던 동네 아저씨가 막지 않았더라면 나도 총알받이가 되어있었겠지. 차라리 그랬으면 지금 마음만은 편했겠지.......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도 민수를 묻었던 자리 옆에 창수의 몸을 비닐로 싸고 묻었어. 근데 그렇게 묻은 게 어떻게 묻었는지 모르겠더라고. 기억이 안나. 아마 맨 정신은 아니였겠지. 그리고 광주에서는 도저히 살지 못하겠더라고. 계속 황폐해지는 고향에 사람들이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에 창수의 죽음과 귀에서 계속 울리는 통곡 소리가 견딜 수없어 도망치듯 서울로 발령을 받아 가족들을 데리고 올라갔지. 아니 도망치듯 온 것이 아니라 도망친 것이지. 아내가 계속 뒤를 돌아보더라고. 아들을 아무도 없는 그 곳에 혼자 내버려둔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랬을 거야.
서울에 올라왔는데 도저히 억울하고 분통해서 못 참겠더라고. 금남로에서 살려달라고 외치던 자신의 동족들을 무참히 짓밟고 총으로 쏴 죽이고 대검으로 베어 버리는 공수 놈들의 모습이 내 아들과 내 고향 사람들의 짓밟히는 모습이 너무 눈에 선해서 이 한국이라는 나라가 정말 사람이 사는 나라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결국은 그래, 잡혀가서 고문을 당하고 병신이 돼는 일이 있어도 억울함은 풀고 죽자 해서 기사를 썼지. 그 때 마침 서울에는 나와 뜻을 같이 하는 기자들이 꽤 있었거든. 그들의 든든한 지원을 얻어서 기사를 신문에 실었어. 내가 아직도 기억나는 기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내가 쓴 기사로 인해 내 가족들이 위험에 처하니까 비행기표 구해서 지금 사는 미국으로 보내주고 창수 무덤을 옮겨준 사람인데 ‘한의주’ 라고 아직도 살아있으면 꼭 만나고 싶어. 여하튼 그래서 결국은 기사를 발표하고 바로 그 날 가족들이랑 미국으로 떠나왔지. 아직도 그 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쿵쾅쿵쾅 거려.
라는 말로 할아버지의 얘기가 끝이 났다.
물론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하지만 내가 이유를 묻지 못한 것은 내게 보이는 할아버지의 쓸쓸한 눈물 때문 이였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공항에서 할아버지의 말씀은 내 가슴 깊이 박히게 되었다.
“더 이상 이 한국에는 미련이 없구나.”라는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