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2008년/글]우수상 - 김준철(세명컴퓨터고2)
우수상·5·18재단이사장상
화려한 그날의 기억
김준철 세명컴퓨터고등학교 2학년
‘그날’의 경험
저는 제 짧은 경험으로 이 글을 열고자 합니다. 작년 여름 어느 날, 저는 당시 이슈가 된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상암 월드컵경기장을 찾았습니다. 저녁 7시가 지난 늦은 시간이었는데, 월드컵경기장 주변에는 빨간 조끼를 입고 머리에 띠를 맨 다수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극장 정문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었고, 곧이어 말끔한 양복 차림의 극장 직원들이 관객들을 정문 우측의 다른 통로로 안내하기 시작했습니다. 머릿속이 영화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인지, 한 번도 본 적 없던 그 낯선 풍경 앞에서 누구나 그저 직원의 안내에 따를 뿐이었습니다.
그 날, 5.18 민중 항쟁을 다룬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언젠가 학교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교과서적인 이야기와 더불어, 영화만의 각색이 더해졌을 그 영화는 화려한 영상미와 더불어 후반부의 국군의 폭동 진압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한 나라 안에서 시민군과 국군이라는 두 집단이 대치했었다는 역사를 영상으로 접하면서, 저는 과연 무엇이 원인인가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피를 흘려야만 했던 것일까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날 극장을 나오면서 마주한 ‘그날’의 부분적인 재현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극장 앞의 무리는 파업을 하고 있던 노조원들이었습니다. 시간이 어쩌면 그렇게도 겹쳤는지, 제가 극장을 나설 때 노조원들과 전경 간의 격렬한 마찰이 있었습니다. 검은 투구에 방패를 든 공권력은 총만 들면 영화에 나왔던 군인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고, 그에 맞서 몸을 부대끼는, 전경 건너편의 찡그린 얼굴들은 영화 속 시민군들의 얼굴처럼 보였습니다. 넘실대는 소란 속에서 제 눈앞의 광경은 광주의 그날과 겹쳐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옆에서 소곤거리는 몇몇 사람들의 말을 엿듣고, 그것이 착각임을 깨달았습니다. “저 사람들 뭐야?”라고 묻는 어린 아이의 질문에 아이의 어머니는 그들, 한자리에 모여 사회의 부조리에 저항하던 그 사람들을 사회의 악 마냥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사회에서 완전한 타자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꿈을 갈망하고 이룸
그 경험을 하기 전까지, 어떤 사람이든지 자연스럽게 민주주의를 갈망할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회와 민중이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몇 주 전 부탄에서 하향적인 민주화가 일어나자, 부탄 시민들은 선거에서 왕당파를 지지해주었습니다. 100석 중 93석 꼴로 왕정 지지자들이 의석을 차지했습니다. 부탄 사람들을 왕정에 길들여진 노예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겠지만, 어쨌든 부탄 사람들은 어떤 압력도 받지 않은 자의로 왕정 지지자들을 자신의 대변자로 선출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로, 28년 전의 대한민국의 광주 시민, 그리고 대한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갈망했습니다.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자, 전국에서 유신 체제라는 이름의 왕정에 질린 세대들이 드디어 민주주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며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국군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육군 참모총장을 체포하는 하극상을 일으킴으로써, 그들의 꿈은 일단 허무하게 꺼져갔습니다. 광주에서 5.18 민중 항쟁이 일어나기 이틀 전에 서울역 앞에서 10만여 명이 시위를 했다고는 하지만, 결국 그렇게 민주화는 멀어져만 갔습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주요 도시로 비상계엄령이 확대되자, 광주에서 대학생들이 그 부조리한 행위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공수부대는 그 학생들을 폭력으로 해산시켰습니다. 이에 대학생들이 도심에서 시위를 계속하자, 공수부대는 시민과 시위대를 구분하지 않고 살상했습니다. 공권력이 진압에서 살상으로 그 범위를 넓힐수록 시위대의 규모 또한 커져만 갔습니다. 결국 27일, 광주는 눈과 귀가 먹은 채 제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잔인하게 짓밟혔습니다. 그러나 진압된 희생은 그저 그렇게 꺼져간 것이 아니라, 이후의 6월 항쟁 등으로 이어져 결국 민주화라는 소박한 꿈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민주주의, 그러나…
그 때 군인이었거나 청년이었던 분들은 이제 우리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이 사회의 핵심적인 동력원을 맡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렇게나 민주화를 꿈꾸셨던 분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소망하던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계십니다. 하지만 뉴스를 통해 사회를 직면하게 될 때마다, 이 사회의 부조리를 온몸으로 느낄 때마다 그분들이 왜 30여 년 전 피를 흘리셨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우리나라의 굵직한 선거들이 몇 있었습니다. 새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있었고, 몇 주 전엔 의회에서 국민을 대표할 새 대표자들을 뽑는 선거가 있었습니다. 이런 선거와 참여가 모두 민주주의 덕분임을, 광주에서 피를 흘리셨던 많은 분들의 덕분임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고귀한 선거에 대한 참여율은 그러한 앎을 반증합니다. 특히나, 가장 참여도가 높아야 할, 자신들의 대표자를 뽑는 국회의원 선거의 참여율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또, 학생들은 그런 뉴스를 보며 정치는 믿을게 못된다느니, 나도 선거를 안 하겠다느니 부모님 세대의 불신적 성향을 자연스레 답습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광주에서 수십만이 시위를 하며 피를 흘렸던 것입니까? 오늘날 한국 사회는 나와 상관없는 일에는 손톱만큼도 관심을 주지 않는 사회, 생계를 걱정하고 권리를 찾고자 하는 노조의 시위를 사회를 어지럽히는 행위로 보는 사회, 투표확인증이라는 유인책에도 불구하고 절반 이상이 투표권을 포기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사회의 부조리를 눈감고 지나가며,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광주에서 그들은 왜 시위를 했었던 것일까?’하고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광주 민중 항쟁은 ‘공동체’를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 좀 더 구체화 한다면, 이제는 나이가 찬 시민이라면 누구나 부여받는 그 ‘선거권’을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국민의 절반이 포기한 그 권리를 위해, 30여 년 전 국민은 압제를 견디고 피를 흘리며 죽어간 것입니다.
5월 18일의 투사들이 광주에서 흘린 피는 우리에게 선거권을 주려고, 그리하여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인간다운 곳, 더 살기 좋은 곳, 부조리가 적은 곳으로 만들고자 흘린 피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고귀한 권리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민중 항쟁에 참여했던 시민들이 꿈꾸던 민주주의 대한민국은 지금의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그들의 희생을 무색하게 하는, 이러한 무관심과 선거 불참 현상이 지속될까봐 혹은 더 심화될까봐 걱정됩니다.
청소년으로서의 소박한 꿈
제 세대는 태어날 때부터 민주주의라는 특권을 손에 쥐고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청소년들에게 민주주의는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거나 막연하게만 다가올 뿐입니다. 이 가운데, 1980년 5월 18일 당시 피 흘린 ‘그들’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나와는 상관없는 타자로 변하여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시민들은 이제 사회의 평등보다는 경쟁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적지 않은 기간 동안 경쟁에 길들여진 탓인지, 점점 사회의 약자들을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 노력이 부족하여 그렇게 된 사람으로 낙인찍고 있습니다. 아마 아무 생각 없이 선거권을 받게 될 저희 세대가 사회의 동력원이 될 즈음이면, 이런 비민주적인 현상이 더욱 당연시되고 심화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을 그저 민주화와 자유주의 이후의 어쩔 수 없는 ‘당연한 결과’로 치부하며 낙관할 것이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길 원합니다. 부조리를 능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은 국민의 능력, 민주주의의 능력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누구 덕분에 선거권을 가질 수 있었는지, 이 선거권을 무엇을 위해 가지고 있는지 생각하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화려한 그날의 기억’을 되찾길 바랍니다. 그 이후에야 그 기억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이 단순한 개인들의 계약에 의해 성립한 기계적 존재에서 좀 더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공동체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