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2014년/글]최우수상 - 원희영(김포외고3)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김포외고 3학년 원희영
작년 이맘때 쯤 샛노란 개나리들이 앞 다투어 꽃망울을 터뜨릴 때 옆집이 새로 이사를 왔다. 주말이라 전날 학교 기숙사에서 나와 집에서 엄마가 해주신 맛있는 밥을 먹고 가족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새로 이사 온 집이에요.”반가운 미소로 말을 건네며 옆집으로 이사 온 아주머니께서 손에 들려 있던 시루떡을 내미셨다. 나는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이사 떡이라 조금 낯설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옆집 아주머니가 주신 떡으로 우리 가족은 이웃의 정을 느끼는 간식을 먹었고, 부모님은 마음이 따뜻한 이웃이 이사 온 거 같아 기분이 좋다고 말씀하셨다.
짙은 녹음들 사이로 쏟아졌던 햇빛이 원숙해진 빛으로 가로수에 울긋불긋한 단풍을 달아주자 우리 집은 김장을 준비하느라 분주해졌다. 옆집 아주머니께서는 우리 집에서 김장을 하는 것을 아시고 도와주려 오셨다. 도시에서 좀처럼 느껴보지 못한 옆집 아주머니의 고운 마음씨에 우리 가족은 또 한 번 마음이 따뜻해졌다. 어른들의 능숙한 손놀림으로 새하얗던 배추 속살이 먹음직스러운 붉은 색으로 탈바꿈하여 김치 통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일이 모두 마무리 되자 엄마는 삶은 돼지고기와 시원한 맥주를 준비하셨고, 어른들은 둘러 앉아 갓 담근 김치에 고기를 얹어 드시며 이야기를 나누셨다. 나도 한 자리 차지하여 김장할 때만 맛볼 수 있는 그 흥겨운 맛을 느꼈다. 맥주잔이 오가면서 어른들은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 받으셨다.“지금 생각하면 그 때 그 시절을 어떻게 견디고 살아왔는지…. 애 아빠가 죽고 나 혼자 애를 키우면서 시장 통을 전전하며 안 해본 장사가 없었어요.”두 어 잔의 맥주를 마신 옆 집 아주머니께서 당신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꺼내셨다.“우리 아이가 아빠 없이 자라면서 아빠가 빈자리만 남겨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주려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때 아빠가 이루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느라 내가 반 선생이 다 되었어요.”엷은 미소를 짓고 있는 아주머니 얼굴에서 과거의 시간이 아프게 흐르고 있었다. 교과서에서만 짤막하게 접했던 역사의 한 부분이 아주머니의 입을 통해 생생한 다큐의 한 장면처럼 내게 전해졌다.
그 날 밤 나는 얼굴 한 번 뵌 적이 없는, 이미 고인이 되신 아주머니의 남편 되시는 분이 만들고 싶었던 세상이란 것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주머니의 남편을 비롯해 5·18 이라는 역사의 현장에서 쓰러져간 많은 사람들에게 부끄러움과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내게 있어 5·18은 교과서의 짧은 서술만큼 간단했고 학교 시험이 끝나면 쉽게 잊어도 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전에 나는 소설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가 사회의 부조리에 저항하기 위해 두들겼던 북을 떠올려 보면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때‘소리’를 낸다는 것과‘소리’를 잠재운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았었는데 마침표를 찍지 못한 이 생각이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오직 하나의 악기만이 연주 될 때 보다 여러 악기가 각자의 소리를 내며 어우러졌을 때 웅장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의 소리처럼, 우리들의 소리도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올바른 소리를 내고 올바른 행동을 해야만‘올바름’의 힘이 나올 수 있는 것처럼,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는 침묵이 주는 죽은 소리가 아닌, 살아있는 저마다의‘곧은 소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광주 민주화 항쟁에 참여한 많은 광주 시민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자신들의 곧은 소리를 내면서 불의에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것은 단 몇 줄로 요약될 수 있는 역사가 아니라, 우리들의 정신 속에서 영원히 살아있어야 하는‘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5월의 푸른 하늘 아래에서 군화에 짓밟힌 정의를 다시 세우기 위해 쏟아져 나왔던 많은 함성들처럼 나의 목소리와 내가 힘껏 내리쳐야 하는 나의 북을 생각하면서 나의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명료해졌다.
침묵하지 말아야할 때 터져 나오는 소리들은 마치 무수한 조각들을 끼워 맞추는 사회라는 퍼즐 판에 자신의 존재감을 끼워 넣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각 개인들이 사회의 부조리한 것을 보고서도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는다면 사회라는 퍼즐은 평생 다 맞추어지지 못한 채 미완의 상태로 존재할 것이고 권력욕에 사로잡힌 누군가가 정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쉽게 들어 설 수도 있을 것이다. 퍼즐 판에 내가 끼워야 할 나의 조각을 생각해 보면서, 이번 5월에는 광주에 꼭 한 번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