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2014년/글]우수상 - 강수현(관교여중3

아버지의 일기

관교여중 3학년 강수현


"아빠가 병원에서 무료하시 단다. 책 좀 골라오렴."

 

엄마의 목소리는 걱정으로 가득했다.

아빠의 병이 다시 나빠졌기 때문이다. 아빠는 여유로우신 것 같지만, 그 점이 오히려 엄마를 초조하게 하나보다.

아빠는 '이제 죽어야지'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이번에도 '다 내 업이다, 이제 죽어야지' 하는 통에 엄마의 호통이 이어졌다. 병원에서 다시 검사를 받아보자는 말에 엄마는 거의 쓰러지다시피 했다.

짹짹대는 새소리가 창문너머 들려왔다. 사실 아빠는 조금 어색한 존재였다. 별 이유 없이 내가 커가면서 사이는 멀어졌다. 나는 서재로 들어섰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아빠는 다정했었다. 곧잘 옛날이야기를 해주셨으니 무뚝뚝한 아빠로선 피나는 노력에 틀림없다. 문득 집으려던 책 옆에 수첩이 하나 있었다. 구겨진 수첩을 꺼내 펼친 순간 이것이 아빠의 일기임을 직감했다.

 

1980년 5월 18일

며칠 째 신발 끈도 풀지 못하고, 전투복도 벗지 못한 채 잠을 자고 있다. 언제라도 출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라는 이유에서였다. 드디어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지금 길을 떠난다.

 

1980년 5월 20일

퇴각명령이 떨어졌다. 시민들은 떠나는 여단에 박수를 치며 군가를 불러주었다. 시민들은 악수를 하기도 하고 말을 걸기도 했다. 그러나 군은 다시 시위를 진압하러 올 게 뻔해 보였다.

"형, 밥은 먹었어요?"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 손에 만두를 쥐어주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감사를 하기엔 뭣한 상황이라 당황한 채 바라보는데, 대열은 빠른 걸음으로 움직여 청년은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유가 무엇인지 손에 쥔 만두를 쳐다보았지만 먹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슴 속에 그 청년의 순진한 미소가 걸렸다.

 

1980년 5월 21일

우리는 걸어서 광주도청에 도착했다. 실탄을 나눠받은 여단에 맞서 시위대가 몰려있었다. 긴장 속에 서로 침만 삼키고 있던 때였다. 시위대의 차량이 돌진하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몸을 피했고, 장갑차도 황급히 후진했다. 그러던 중 피하지 못한 군인이 깔렸고, 그 일병은 곧바로 죽어버렸다. 자세히는 보지 못했지만, 충분히 충격적이었고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지휘관은 하얗게 질린 나를 도청 지하실로 들여보냈다. 그렇게 떨고 있을 바에는 안에 있으란 거였다. 광주에 도착하고서 이어진 총성과 절규, 그리고 오늘 있었던 병사의 죽음은 시위보다 전쟁에 가까워 보였다.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나눠받은 실탄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이것으로 누구를 죽여야 하는 걸까. 실탄을 멘 가슴팍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다시금 총성이 들려왔다. 너무 놀라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데 한 중사가 들어와 말했다.

"그 놈들이 부하를 죽이 길래 막 쏴버렸다."

자랑스러운 어투였다. 순간 만두를 주었던 청년이 떠올랐다. 그도 금남로에 있을 터였다. 격양된 어조로 바깥상황을 전하는 중사는 나라가 어지러우니 우리가 지키자며 말하던 의젓했던 선임병이었다.

우리는 다시 철수 명령을 받았다. 어디로 가야하는 지도 모르고 걸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무등산이란다.

"영철아, 이 부대에 계속 있다간 사람 몇 죽어나가는 건 일도 아니게 되겠다."

동기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포로로 잡혀온 대학생을 총살했다는 얘기였다. 정말이냐며 되묻자 다른 대대의 병사가 말해준 것이라고 둘러댔다.

잠자리에서는 밤늦게 수다를 떠는 병사가 없었다. 다들 총을 가까이에 두고 잠에 들었다. 불안이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었다.

 

 

1980년 5월 27일

도청 탈환 작전이 시작되었다. 도청스피커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머리가 다 아득해질 정도였다. 이윽고, 그보다 더 큰 총성이 울렸다. 모두 총구를 앞으로 들이밀고 떨리는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영철아, 나는 지금 뭘 하는지 모르겠다, 이게 사람이 할 짓인지."

동기가 두려워했다. 그건 모든 군사들이 마찬가지였다.

떨리는 다리를 손으로 부여잡았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곳은 전장이었다. 같은 민족끼리 총을 겨누는 또 다른 비극인 것이다. 죽을 수도 있단 생각에 무작정 실탄을 쏴댔다. 그 총알에 누가 맞았는지, 맞지 않았는지 모른다. 등 뒤로 애국가와 총성이 끊임없이 들렸고, 나는 도망쳤다.

 

낡은 수첩을 덮었다. 그 뒤의 일기는 자신이 도망쳐서는 안 되었다며 자책하는 내용이었다. 아빠의 일기는 상처의 흔적이었다.

누렇게 변한 수첩이 쉽사리 손에서 놓아지지 않았다. 마치 수첩이 30여년 전의 항쟁 그 자체라도 되는 듯이 여겨졌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나는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그 시절 희생된 청춘들에게, 나의 아빠에게 바치는 묵념이었고, 상처의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의 묵념이었다.

고개를 들고 보니 어느새 점심 때가 멀지 않았다. 옆에 놓인 휴대전화의 진동이 울렸다. 아빠였다.

추모글 모음

5・18 추모의 글

순서 성명 추모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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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양 *
2023년 5.18 민주화운동 광주항쟁은 현재도 영원히 함께 계속 되고 있읍니다. 후손과 후대들의 혼란된 생각과 착오로 '참사 사건 사고'로 동일시 하려는 모습이나 태도는 민주화운동의 5.18광주항쟁을 다시 새롭게 역사적 필연성인
유신독재의 만행과 참상을 잘 몰랐기 때문이라고 사려 됩니다. 1980년 5.18 '서울의봄' - 군부독재자들의 '계엄령'
- 백주 대낮에 군부독재자들이 저지른 '살인 행위' - 정말로 순수한 시민 한분 한분의 몸마음을 무참히 살육한 반민주적 반인권적 국가적 학대와 폭언폭력으로 보편적 국가적 살인 행위자들 입니다. 얼마나 수많은 시간들이 흘러야 회복이 될 수 있는지도 묻지 말아요. 대한민국의 국가가 존재하는 한 영구히 존속될 진상 규명과 배상 및 보상이 '독립적' 존귀함으로 살아 대한민국 순수혈족의 몸마음의 믿음의 거듭남의 민주화운동 계승 영속성으로 지켜내기를 항상 감사와 경외 함으로 모든 영혼 한분 한분을 위해 축원 올립니다. 2023.1.26(목)
글작성자 새문안교회 양윤순집사 금요철야기도 집중기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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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이영 * 기억하겠습니다.
151 ㄱㅈ * 희생당한 시민분들이 정말 멋지네요
150 강태 * 5.18 그날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149 나만 *
중학교 1학년 막 입학한 후였다.
갑자기 학교 등교하지 말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는 학교 안가니 무조건 좋았다.
먼 거리 비포장 자갈길을 자전거로 통학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광주에 폭동이 일었다고 들었다.

518이 끝나고 난 후 분실한 총기를 찾는다며 수업을 매번 빠뜨리고 전교생이 동원되어
강변 갈대 숲을 뒤지면서 총기를 찾아다녔다.
얼마 후 시내 남녀 중고등학생들 모두를 동원하여 대로변 양옆에 도열하게 한 후 검은 차가 지나가면 손을 열렬히 흔들라고 교육을 받았다.
한참 후 검은 차 몇대가 지나가는데 우리는 북한 보신박수 수준과 열광적인 환영식을 강요받았다.
어린 마음에도 더럽게 기분이 나빴다.
3년 후 광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입학하자 마자 최루가스로 범벅이 된 대학 정문을 지나 학교를 드나들었다.
전경들이 대학 내로 진입하여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끌고가던 시절이었다.
대자보를 열심히 읽었다.
뭔가 이 사회가 정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처음에는 어렴풋이, 1년이 지나자 518때 공수부대의 학살 장면, 당시 폭도라던 시민들 사이에 한 건의 절도사건도 없었음을 일상적으로 사진으로, 그리고 몰래 돌려보는 518 항쟁 관련 유인물들과 대자보를 통해 볼 수 있었다. 그 때 정말 이 나라는 혁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두환은 반성과 사과 한 번 없이 7년 내내 기세등등했다.
518기념일이 되면 망월동 입구에서 전경들이 닭장차를 대기시키고 무조건 체포하여 버스에 실어 교통수단이 없는 먼 오지에 버려두곤 했다. 그걸 피하기 위해 3KM여 정도를 더 우회하여 망월동 묘지를 참배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2학년 때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하모니커를 불었는데 당일 시위한걸 깜박하고 하모니커를 연주하면서 길게 들이마신 후 일주일동안 목에서 피가래가 계속 나와 수업을 받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일주일 계속된 피가래 증상 이후 지금까지 30년이 넘게 건조한 계절이나 여름에 에어컨을 틀면 물병을 들고 산다. 그렇지 않으면 사래 들려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이다.

다시 오늘 518을 맞는다.
윤석열이라는 희대의 정치검사와 그의 졸개들이 이제 국민 여론은 아예 깡그리 무시하고 법도 무시하면서 노골적으로 법위에 군림하는 정치를 하고 있다.

어제 윤석열이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을 만들어 엄단하겠다고 했다.
야 윤석열 이 더러운 정치검사야,
네 마누라 김건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수사 이따위로 뭉개면서 또 제2의 채널A사건 만들어 유시민 같은 정적 제거하려고 기도하고 있나?
이런 더러운 놈들이 공정과 상식과 법과 원칙을 입에 올리는 이 참담한 현실,
절대 그대로 지켜볼 수 없다.
제주의 4.3도 419 혁명도 80년 광주항쟁도, 87년 노동자 대투쟁도 여전히 완성되지 못하였다.
이번 봄에는 멀어도 광주에 꼭 다녀와야겠다.
들리는 길에 노무현 대통령님의 고향도 꼭 들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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