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낙하 함께 한 노태우·전두환…50년 단짝의 끝은 씁쓸 [노태우 별세]

중앙일보 입력 2021.10.26 14:48 업데이트 2021.10.26 15:02 현일훈 기자 

1970년대 중반의 일이다. 당시 공수여단장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난생 처음으로 공수낙하를 해야 했다. 위관 시절 공수단에서 근무했던 그였지만 정작 공수교육은 받지 못한 상태였다. 사십줄의 노 전 대통령으로선 까마득한 부하들과 함께 훈련받는 게 고역이었다. 게다가 직전에 인접 부대의 여단장이 착지 과정에서 쓰러져 정신을 잃는 일까지 있었다. 긴장한 건 당연했다. 그런 노 전 대통령을 위해 함께 뛰어내린 이가 있으니 바로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 전 전 대통령은 당시 제1공수 특전단장이었다. 주변에선 “두 사람의 우정”이라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일생에서 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전 전 대통령이다. 노 전 대통령 스스로 “우리 두 사람은 우정과 동지애가 유난히 강했는데 공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라며 “다른 사람들에게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특수한 관계”라고 규정했다. (노태우 육성회고록)

두 사람이 만난 건 1952년 1월 신설된 4년제 육군사관학교에 함께 입교하면서다. 육사 11기로 200여 명이 동기였다. 64년 3월엔 두 사람이 주축이 돼 육사 출신의 결사 조직인 ‘하나회’를 꾸렸다. "나라의 기둥은 우리다"가 창설 구호였다. 두 사람은 리더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다. 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12ㆍ12 쿠데타도 함께 감행했다.

노 전 대통령은 전 전 대통령의 자리를 네 차례 이어받았다. 대령 시절 서종철 육참총장의 수석부관(70년 1월), 그리고 장군이 돼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78년 1월), 국군보안사령관(80년 8월), 그리고 민정당 총재(87년 8월)였다. 물려받은 건 아니지만, 대통령직도 이어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이런 ‘인수·인계’ 관계에 대해 “전 전 대통령은 일이 벌어지면 누구보다 먼저 뛰어가는 스타일이어서 기회도 많지만, 운이 좋지 않으면 쓰러지는 경우도 있을 거 아니냐. 쓰러지지 않도록 내가 중심 잡는 역할을 맡다 보니 그런 것”이라며 “성격이 묘하게 상호보완적이었다. 이것도 운명”이라고 회고했다.

두 사람의 우정에 금이 간 건 88년 무렵이다. 고인이 대통령이 된 후 여소야대 상황에 부닥쳤고, 5공 청산이란 시대적인 압력은 하루가 다르게 거세졌다. 고인은 결국 전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보내야 했다. 측근인 손주환 전 공보처 장관의 회상. “당시 야당에선 전 전 대통령의 구속까지 요구했지만 노 전 대통령이 ‘절대 안 된다’고 버텼다. 대통령은 친구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많이 갖고 있었다. 우리가 관찰한 바로는 대통령이 할 수 있는 무리한 수까지 두면서 전 전 대통령을 보호했다고 본다.”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인 94년 6월 두 사람은 측근들과 함께 강남의 음식점에서 화해의 술자리를 가졌다. 그러나 95년 겨울 비자금 사건으로 두 사람 모두 구속되고, 이후 12ㆍ12와 5ㆍ18 수사가 겹치면서 다시 사이가 멀어졌다. 99년 노 전 대통령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전 전 대통령이 조문해 20여 분간 독대한 게 사실상 마지막 만남이 됐다. 스무 살 친구로 시작해 최고 권력을 같이 누렸던 우정의 끝은 쓸쓸했다.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서 기립해 있는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연합뉴스]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사연이 남아 있다는 것은 하나의 역사지요.” 노 전 대통령이 생전에 남긴 말이다.

현일훈 기자 hyun.ilhoon@joongang.co.kr

추모글 모음

5・18 추모의 글

순서 성명 추모의 글
28 양세 *
5.18 민주 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역적 살인마 전두환과 그 패거리들의 최후를 보는 그날까지 다함께 투쟁합시다. 살인마 전두환을 척결합시다. !!!
27 나민 *
저는 5월 26일 광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저희 어머니는 병원에서 저를 못 나으시고 3일 고생하시어 저를 집에서 낳으셨지요. 5.18은 저에게 있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비록 당시를 직접 경험하고 기억하지 못했지만 5월에 광주에서 태어났어야 하는 이유만으로 꼬리표 처럼 저를 따라 다녔지요. 그분들이 목숨걸며 지키고 싶었던 민주화 국민들이 가져야 하는 권리를 갖을 수 있었던 그분들의 선혈...제가 죽을때까지 기억하겠습니다. 그분들의 목숨과 맞바꾼 저의 행복한 삶 깊이 새기며 간직하겠습니다. 제 자식들에게도 잊지 않도록 이역사를 알려주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26 최동 * 5월의 넋이여 살아가는 동안 아니 눈을 감아서도 그대들에게 진 빚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곳에서는 편히 쉬시길..
25 김소 *
곧 40주년인 광주 민주화 운동
민주화를 위해 애쓰신 분들의 희생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또한 지금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 치지 않는 책임자에 대한 처벌 또한 하루빨리 정당히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24 차광 *
이땅의 민주화를 위해 소중한 목숨까지도 바치신 민주영령들께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이 땅에 살아있는 저희가 뒤를 잇겠습니다. 책임자 처벌과 함께...
23 김대 *
억울한 영령들의 원혼을 주님 위로해 주소서...

5.18 군부 가담자들과 사병 한 명까지도 찾아내
엄벌에 처해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겠습니다...
22 김대 *
억울한 영령들의 원혼을 주님 위로해 주소서...

5.18 군부 가담자들과 사병 헌 명까지도 찾아내
엄벌에 처해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겠습니다...
21 김해 *
5월~!
장교로 근무하던 2기갑의 탱크가 서울시청 앞에 주둔했다.
세월이 꽤 흘렀지만,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뭐라 할 말이 없다.
광주시민은 폭도로, 김대중 전대통령에게는 사형을, 그리고 그 이후 살아오면서 주변의 광주 비하 발언을 수없이 들으며 살아왔다.
SNS에도 '홍어족'이니, '빨갱이'니무분별한 비난 글에도 가슴을 움켜쥐며 살아왔다.

5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한 분들도 있다.

60대 중반의 나이에,
이제 나 또한 살아오면서 가슴에 묻어둔 아픔과 미움을 지우려 한다.

사랑합니다! '광주'~♡
사랑합니다! '대한민국'~♡
20 문수 *
코로나19 참사를 대한민국 온국민이 함께 희생과 마음을 모아 이겨내고 있는 지금. 민주와 정의를 외치는 우리 시민에게 총을 드리댄다는 것이. 죽음으로 몰아 간다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진실은 밝혀져 있습니다. 반드시 그 죄인의 처벌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19 김석 * 그날의 함성을 잊지않고 앞으로도 민주정신이 계속 발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민주화에 힘쓴 모든 사람들에게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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