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에서 재현된 '5·18'의 비극... 그 결정적 장면들
한국일보 홍인기 기자 2021.03.27. 13:00
<흑백사진으로 남은 5·18광주민주화운동, 놀랍도록 흡사한 미얀마 사태의 참상>
총을 멘 군인들이 길바닥에 쓰러진 시민을 곤봉으로 내리치고, 더 이상 항거하지 못하는 청년들을 거칠게 끌고 간다. 군경의 유혈 진압에 목숨을 잃은 희생자 유가족은 오열하고, 분노한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군부독재 타도를 외친다.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흑백 사진으로 기록된 역사적 장면들이 41년이 지난 지금 미얀마에서 재현되고 있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민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군경의 무자비한 폭력이 자행되는 현장. 미얀마 주요 도시 곳곳에 시위대가 만든 바리케이드 등 각종 저항의 흔적들이 쌓여가고, 희생자의 억울한 죽음과 유족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5·18 광주'를 겪은 우리 국민들에게 군부 쿠데타에 맞서는 미얀마 시위대의 모습은 '남의 일' 같지 않다. 매일 외신을 통해 전해지는 참상을 지켜보면 5·18의 비극이 떠오른다. 미얀마 국민들도 SNS를 통해 광주의 역사와 미얀마 현지 상황을 비교하며 우리 정부와 국민들의 적극적인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시공을 초월해 비슷한 장면으로 겹쳐진 두 장의 사진처럼, 미얀마 사태와 5·18광주민주화운동은 그 출발과 진행과정이 비슷하다. 미얀마 군부는 지난달 '총선 조작'을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후 시민들의 반 쿠데타, 민주화 촉구 시위가 한 달 이상 이어 오고 있다. 5·18 역시 1979년 '12·12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가 이에 항거하는 학생 시민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총칼을 앞세운 군부의 무력 진압 또한 미얀마와 광주의 공통점이다. 미얀마 군부는 소수민족 반군들과 교전을 이어 온 부대를 비롯해, 지난 2007년 반정부 시위를 잔혹하게 진압한 부대까지 동원해가며 무차별 총격과 폭행, 고문을 자행하고 있다.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이 7공수여단을 광주에 투입해 시민들을 학살한 역사가 미얀마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듯하다.
군경의 무력 진압은 무고한 희생을 양산하기 마련, 미얀마 인권단체 정치범지원협회에 따르면 쿠데타 발생 이후 누적 사망자는 250명을 넘어선다. 시간이 흐를수록 군경의 무차별 총격이 시위대뿐 아니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뤄지고 있어 인명피해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5·18 당시 광주에서 사망하거나 실종된 사람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정부 차원의 조사에서 사망자 193명, 행방불명 48명으로 집계됐지만, 암매장 등의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만큼 실제 희생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위 가담자뿐 아니라 지역 내 모든 시민들을 군법으로 통제할 수 있는 계엄령이 선포된 점도 비슷하다. 미얀마 군부는 최대 도시 양곤 내 다수 지역에 계엄령을 발동하고 시민들을 통제, 탄압하고 있다. 계엄령으로 인해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어려워진 데다 안전마저 위협받는 상황이 닥치자 시민들은 탈출을 감행하고 있다. 시내 도로 위엔 차량과 오토바이, 삼륜차 등에 가재도구를 싣고 도시를 빠져나가는 시민들의 탈출 행렬이 이어진다. 5·18 당시 전남도청 진압작전이 임박하자 손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 '피난'을 가는 광주시민들의 모습도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5·18의 비극이 광주 지역에 한정됐던 것과 달리 미얀마 사태는 수도 네피도를 포함해 양곤, 만달레이 등 전국 주요 대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시위에 가담하거나 동조하는 계층도 대학생부터 노동자, 스님, 교사, 공무원을 아우르면서 전 국민적인 저항운동으로 번지고 있다.
40여 년 전 전두환 정권이 모든 언론과 통신을 차단하는 등 광주를 봉쇄한 탓에 비극적인 상황이 외부로 즉각 알려지지 않은 데 비해, 인터넷과 SNS 등을 통해 미얀마의 참사가 연일 세계 각국으로 전해지고 있는 점에서 미얀마와 광주는 다르다. 쿠데타 초기부터 미얀마 군부는 인터넷을 통제하고 있지만 국제사회에 사실을 알리려는 시민들의 의지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미얀마 반 군부 시위의 동력은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열망이다. 억압에 맞서지 않으면 쿠데타 이전 경험한 민주적 삶을 되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다. 5·18을 비롯해 힘겨운 민주화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한 대한민국이 국정농단에 맞서 촛불을 들어 올린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