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계엄군·유족 만남 이끈 이 사람 "양심고백 이어지길"

오마이뉴스 21.03.17 소중한 기자

[스팟인터뷰] 최용주 5.18진상조사위 1과장 "유족 찾아 공개 사죄, 세계사적으로도 드물어"

"익명의 대상을 상대로 사과하는 사례는 그 동안 많았는데, 자신이 죽인 이를 특정해 그 유족을 만나 사죄한 건 세계사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한 청년을 사살했던 계엄군 A씨가 지난 16일 유족을 직접 찾아 사과했다. 그 동안 일부 계엄군의 목격담은 여럿 있었지만, 계엄군이 직접 자신이 죽인 이의 유족을 만나 공개 사과한 건 41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관련기사 : 청년 쏴죽인 5.18 계엄군, 유족 앞 첫 공개 사죄 http://omn.kr/1sgv4).
 
고백과 증언, 사과와 용서가 이뤄지기까지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위원장 송선태)의 역할이 컸다. 지난해(2020년) 7공수여단의 작전사항을 살피기 위해 고 박병현씨(1956년생)의 사례를 추적하던 위원회는 A씨가 박씨를 죽인 인물임을 알게 됐다. 
 
지난 1월 A씨를 만난 위원회는 그로부터 '사죄하고 싶다'는 의사를 확인했고, 이를 전남 해남에 사는 박씨의 형 박종수(73)씨에게 전했다. 박씨는 고민 끝에 A씨를 만나기로 했다.
 
위원회는 A씨의 사죄를 개인의 도덕적 반성을 넘어 공적 영역으로 끌어오고자 했다. 그래서 A씨에게 공개 사죄를 요청했다. A씨로선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나 위원회 설득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이번 만남을 총괄한 최용주 위원회 1과장은 17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유족도 '응어리가 풀렸다'고 말하고, A씨도 연신 '고맙다'고 그러더라.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라며 "우리 위원회로서도 가장 보람된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번 사례를 통해 계엄군들의 양심고백이 이어졌으면 한다. 결국 사과와 용서가 아픔을 치유하고 사회통합으로 나아가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 아니겠나"라며 "앞으로 이러한 사례가 축적되면 자연스레 5.18 당시 광주에서 있었던 야만적 국가폭력의 실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아래 최 과장과의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유족도 고마워했다... 보람된 순간"
 
- 어떻게 해서 계엄군을 만나게 됐나.
"2001년 '대통령직속 의문사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문사위)'에 신고됐었던 박씨의 죽음은 (죽인 사람을 특정할 순 없었지만) 사망 원인이 명확했고 보상 절차가 진행됐었기에 의문사위 역할 상 조사가 개시되지 않은 사건이었다. 우리도 이 사건을 다시 들여다본 건 (박씨가 숨진 곳 인근에서의) 7공수여단 이동경로 및 작전사항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사안을 훑어보던 중 7공수여단 소속 군인의 양심고백을 발견했고 이것이 박씨의 죽음과 연관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A씨를 찾아갔더니 그도 놀라면서 '당시의 행위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고 우리에게 고백했다. 그는 '이제라도 유족을 만나 용서를 빌고 싶으니 위원회가 자리를 마련해줬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 그래서 박씨의 유족을 찾아가게 된 것인가.
"그렇다. (당시 25세였던 박씨의) 아버님, 어머님은 돌아가셨고 형제 분들이 계셨다. 전남 해남에 살고 계신 큰형님을 직접 만났다. 나와 조사관이 '당신 동생을 사망하게 한 계엄군의 신원을 알게 됐다. 그가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고 말했더니 그는 한참 생각에 빠졌다. 그러더니 '고통을 내려놔야 할 것 같다'며 사죄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 계엄군과 유족의 만남을 언론에 공개하는 것을 두고 위원회도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국가폭력에 의한) 사과와 용서는 개개인 간의 문제로 끝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의미가 있다. A씨의 신원은 공개하지 않는 선에서 그의 사과를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유족도 이를 받아들였다."
 
- 공개 사과를 제안하자 A씨는 어떤 반응이었나.
"고민을 많이 하더라. 다만 이 과정이 갖는 사회적 의미에 대해 충분히 설명했고 이에 공감했다."

- 계엄군이 자신이 직접 죽인 이의 유족을 만나 사죄를 했다는 것 자체로 큰 의미가 있어 보인다.
"5.18 이후 처음 있는 일이며 세계사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기존엔 계엄군의 목격담 등이 전부였는데 A씨는 본인의 행위에 대한 고백을 한 것 아닌가. 또한 익명의 대상을 상대로 사과하는 사례는 그 동안 많았는데, A씨처럼 자신이 죽인 이를 특정해 그 유족을 만나 사죄한 건 매우 드물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유족도 '내가 용서하고 싶어도 누굴 용서해야 할지 몰랐는데 이렇게 나서줘 고맙다'고 하더라."
 
- 어디선가 보고 있을 다른 계엄군 출신들에게도 의미 있는 메시지가 될 것 같다.
"그렇다. 이번 사례를 통해 계엄군들의 양심고백이 이어졌으면 한다. 실제로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사과와 용서가 아픔을 치유하고 사회통합으로 나아가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 아니겠나. 이미 우리 위원회도 유사한 사례 몇 건을 더 다루고 있다. 앞으로 이러한 사례가 축적되면 자연스레 5.18 당시 광주에서 있었던 야만적 국가폭력의 실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 개인적으로도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유족도 '응어리가 풀렸다'고 말하고, A씨도 연신 '고맙다'고 그러더라.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 A씨는 오늘 아침에도 전화로 감사의 마음을 전해왔다. 우리 위원회로서도 가장 보람된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 위원회의 역할이 앞으로도 중요하겠다.
"위원회 설립 목적인 진실규명을 위해선 가슴 아픈 과거사 때문에 찢긴 사회 구성원의 갈등을 해소해야 하는 과제를 풀어내야 한다. 사회 통합의 계기를 마련하겠다는 관점에서 위원회 활동을 이어가겠다."

 

원문 링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27776

 

 

 

 

추모글 모음

5・18 추모의 글

순서 성명 추모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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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18 민주화운동 광주항쟁은 현재도 영원히 함께 계속 되고 있읍니다. 후손과 후대들의 혼란된 생각과 착오로 '참사 사건 사고'로 동일시 하려는 모습이나 태도는 민주화운동의 5.18광주항쟁을 다시 새롭게 역사적 필연성인
유신독재의 만행과 참상을 잘 몰랐기 때문이라고 사려 됩니다. 1980년 5.18 '서울의봄' - 군부독재자들의 '계엄령'
- 백주 대낮에 군부독재자들이 저지른 '살인 행위' - 정말로 순수한 시민 한분 한분의 몸마음을 무참히 살육한 반민주적 반인권적 국가적 학대와 폭언폭력으로 보편적 국가적 살인 행위자들 입니다. 얼마나 수많은 시간들이 흘러야 회복이 될 수 있는지도 묻지 말아요. 대한민국의 국가가 존재하는 한 영구히 존속될 진상 규명과 배상 및 보상이 '독립적' 존귀함으로 살아 대한민국 순수혈족의 몸마음의 믿음의 거듭남의 민주화운동 계승 영속성으로 지켜내기를 항상 감사와 경외 함으로 모든 영혼 한분 한분을 위해 축원 올립니다. 2023.1.26(목)
글작성자 새문안교회 양윤순집사 금요철야기도 집중기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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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ㄱㅅ * 희생이 헛되이 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152 이영 * 기억하겠습니다.
151 ㄱㅈ * 희생당한 시민분들이 정말 멋지네요
150 강태 * 5.18 그날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149 나만 *
중학교 1학년 막 입학한 후였다.
갑자기 학교 등교하지 말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는 학교 안가니 무조건 좋았다.
먼 거리 비포장 자갈길을 자전거로 통학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광주에 폭동이 일었다고 들었다.

518이 끝나고 난 후 분실한 총기를 찾는다며 수업을 매번 빠뜨리고 전교생이 동원되어
강변 갈대 숲을 뒤지면서 총기를 찾아다녔다.
얼마 후 시내 남녀 중고등학생들 모두를 동원하여 대로변 양옆에 도열하게 한 후 검은 차가 지나가면 손을 열렬히 흔들라고 교육을 받았다.
한참 후 검은 차 몇대가 지나가는데 우리는 북한 보신박수 수준과 열광적인 환영식을 강요받았다.
어린 마음에도 더럽게 기분이 나빴다.
3년 후 광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입학하자 마자 최루가스로 범벅이 된 대학 정문을 지나 학교를 드나들었다.
전경들이 대학 내로 진입하여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끌고가던 시절이었다.
대자보를 열심히 읽었다.
뭔가 이 사회가 정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처음에는 어렴풋이, 1년이 지나자 518때 공수부대의 학살 장면, 당시 폭도라던 시민들 사이에 한 건의 절도사건도 없었음을 일상적으로 사진으로, 그리고 몰래 돌려보는 518 항쟁 관련 유인물들과 대자보를 통해 볼 수 있었다. 그 때 정말 이 나라는 혁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두환은 반성과 사과 한 번 없이 7년 내내 기세등등했다.
518기념일이 되면 망월동 입구에서 전경들이 닭장차를 대기시키고 무조건 체포하여 버스에 실어 교통수단이 없는 먼 오지에 버려두곤 했다. 그걸 피하기 위해 3KM여 정도를 더 우회하여 망월동 묘지를 참배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2학년 때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하모니커를 불었는데 당일 시위한걸 깜박하고 하모니커를 연주하면서 길게 들이마신 후 일주일동안 목에서 피가래가 계속 나와 수업을 받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일주일 계속된 피가래 증상 이후 지금까지 30년이 넘게 건조한 계절이나 여름에 에어컨을 틀면 물병을 들고 산다. 그렇지 않으면 사래 들려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이다.

다시 오늘 518을 맞는다.
윤석열이라는 희대의 정치검사와 그의 졸개들이 이제 국민 여론은 아예 깡그리 무시하고 법도 무시하면서 노골적으로 법위에 군림하는 정치를 하고 있다.

어제 윤석열이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을 만들어 엄단하겠다고 했다.
야 윤석열 이 더러운 정치검사야,
네 마누라 김건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수사 이따위로 뭉개면서 또 제2의 채널A사건 만들어 유시민 같은 정적 제거하려고 기도하고 있나?
이런 더러운 놈들이 공정과 상식과 법과 원칙을 입에 올리는 이 참담한 현실,
절대 그대로 지켜볼 수 없다.
제주의 4.3도 419 혁명도 80년 광주항쟁도, 87년 노동자 대투쟁도 여전히 완성되지 못하였다.
이번 봄에는 멀어도 광주에 꼭 다녀와야겠다.
들리는 길에 노무현 대통령님의 고향도 꼭 들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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