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쏴죽인 5.18 계엄군, 유족 앞 첫 공개 사죄

2021.3.17 오마이뉴스 소중한 기자(extremes88)

"5.18묘지서 만나 41년 만에 회한의 눈물... 유족 "사과해줘 고맙다" 용서"

41년 만의 첫 사례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한 청년을 사살했던 계엄군 출신 A씨가 지난 16일 유족을 직접 찾아 사과했다. 계엄군 출신이 유족 앞에서, 특히 자신이 직접 죽인 이의 가족을 만나 공개 사죄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청년의 형은 A씨의 사죄를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사과해줘 고맙다"며 외려 그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부둥켜안은 채 용서와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고백과 증언'은 이렇게 첫발을 내딛었다.

유족 "오래 전 다 용서, 명령 내린 놈이 나쁜 놈"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17일 보도자료를 통해 "5.18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공수부대원이 자신의 사격으로 인해 무고한 사망자가 발생했음을 인정하며 유족을 직접 만나 사죄와 용서를 구했다"라며 "그간 진압 작전에 참여했던 계엄군들이 목격한 사건들을 증언한 경우는 많이 있었으나 가해자가 자신이 직접 특정인을 숨지게 했다며 유족에게 사과 의사를 밝힌 경우는 최초"라고 발표했다.
 

앞서 A씨는 위원회를 통해 자신이 1980년 5월 23일 광주시 남구 노대동 소재 '노대남제' 저수지 인근에서 시민을 죽였다고 고백했다. 위원회는 당시 그곳에서 죽은 피해자의 신상을 A씨에게 제시했고, A씨는 그 사람이 자신이 죽인 이가 맞다고 인정했다.

A씨가 사살한 인물은 '국립5.18민주묘지 2-02'에 잠들어 있는 고 박병현씨다. 1956년생인 박씨(5.18 당시 25세)는 광주의 시계점에서 일하던 중 고향 보성의 농촌 일을 돕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7공수여단 33대대 8지역대 소속의 A씨에게 총을 맞아 사망했다.

위원회는 A씨가 유족에 사죄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자 박씨의 형을 만나 이를 전했다. 박씨의 형은 "우리 가족은 이미 오래 전에 다 용서했다. 그 군인이 무슨 죄가 있겠나. 명령을 수행한 죄밖에 더 있겠나. 명령을 내린 놈이 나쁜 놈"이라며 사죄를 받아들일 의사를 밝혔다.

위원회는 두 사람 만남의 공개 여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A씨의 사죄를 개인의 도덕적 반성을 넘어 공적 영역으로 이끌어 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원회의 공개 사죄 제안에 고민을 이어가던 A씨는 결국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A씨와 박씨의 두 형제는 16일 국립5.18민주묘지 민주의문 접견실에서 만났다. A씨는 이 자리에서 유족에게 엎드려 절하며 "어떤 말로도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드려 죄송하다. 저의 사과가 또 다른 아픔을 줄 것 같아 망설였다"며 눈물을 흘렸다. 이어 "지난 40년 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며 "유족을 이제라도 만나 용서를 구할 수 있어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박씨의 형 박종수(73)씨는 "늦게라도 사과해줘 고맙다. 죽은 동생을 다시 만났다고 생각하겠다"며 "용기 있게 나서줘 참으로 다행이고 고맙다. 과거의 아픔을 다 잊어버리고 떳떳하게 마음 편히 살아달라"고 답했다.

위원회는 "그간 위원회는 조사 활동을 통해 A씨의 고백과 유사한 사례를 다수 확인했다"며 "향후 계엄군과 희생자 간 상호 의사가 있는 경우에는 위원회가 이를 적극 주선해 조사위 설치 목적대로 사과와 용서를 통한 불행한 과거사 치유 및 국민통합에 기여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원문 링크:  청년 쏴죽인 5.18 계엄군, 유족 앞 첫 공개 사죄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추모글 모음

5・18 추모의 글

순서 성명 추모의 글
38 이하 *
2000년대에 태어난 저에게는 조선시대 만큼 옛날로 느껴졌던 역사였습니다. 역사시간에 그저 시험을 위해서만 의미 없이 날짜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외우고 시험이 끝나면 까먹기 일쑤였죠. 하지만 오늘 5.18을 추모하며 몇 가지 영상을 보니 과거의 제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5.18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의 제가 민주 항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당시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오늘의 제가,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해주신 분들의 노력을 잊지 않겠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하루일 것 같습니다.
37 최연 * 민주화를 위한 희생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36 김민 * 5.18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35 양희 *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1980.05.20 전남매일신문사장 귀하
34 노무 * 빨갱이 폭동
33 노무 *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
32 한기 *
5월 그날이 다시 오기를 40번
그날 아스팔트에 쓰러진 동료들
1981년 첫해 추모제의 비통했던 기억
또 가슴이 멍멍해진다.
평생을 잊지 못하고 살고 있다.


31 한기 *
5월 그날이 다시 오기를 40번
그날 아스팔트에 쓰러진 동료들
1981년 첫해 추모제의 비통했던 기억
또 가슴이 멍멍해진다.
평생을 잊지 못하고 살고 있다.


30 한기 *
5월 그날이 다시 오기를 40번
그날 아스팔트에 쓰러진 동료들
1981년 첫해 추모제의 비통했던 기억
또 가슴이 멍멍해진다.
평생을 잊지 못하고 살고 있다.


29 이 *
1980년 5월 17일, 종로에는 술취한듯한 군인들이 수 많은 트럭을 타고 군가를 부르며 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광주로 가는 군인들로 짐작 됩니다. 그후에 미국에 살며 한국을 그리며 광주사태에 막말을 하는 자들을 저주하며 40년을 살았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전두환과 그 잔당을 처벌하고 나라를 바로 세울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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