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이 남긴 위대한 유산, 임을 위한 행진곡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민중의 소리 2021.2.19 김동현 기자] 

임을 위한 행진곡, 들어보셨죠?

어떤 분은 흐릿하게 들어보셨을 것이고 어떤 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또박또박 외우고 계실 겁니다. 민중의 애국가라고 불리는, 거의 모든 집회에서, 시민사회단체의 행사에서 시작할 때 울려퍼지는 노래죠.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가 얼마전 타계한 백기완 선생의 글인 것 아시나요? 이 노래가 518광주항쟁을 기리는 노래인 것인지도 아시나요?

오늘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역사를 정리해보겠습니다.

#1 백기완 선생

 

20201년 2월 15일, 백기완 선생이 89세 일기로 타계했습니다. 백기완 선생은 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곁에서 싸운 사람입니다. 한국의 사회운동 전반에 참여했던 민중의 지도자였습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 맞서 싸우다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처음 구속됐고, 1979년에는 ‘명동 YWCA 위장결혼 사건’으로 투옥되었고,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 맞서 싸우다 1986년 ‘부천 권인숙 성고문 진상 폭로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투옥되었습니다.

1987년에는 독자 민중후보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가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습니다. 1992년 다시 독자 민중후보로 대선에 출마해 완주합니다.

그 이후 한국 사회운동의 어른으로 민중의 투쟁 현장, 맨 앞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퍼졌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는 백기완 선생이 옥중에서 지은 장편 시 <묏비나리> -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이라는 시의 한 구절을 노래 가락에 맞춰 다듬어 가사로 만들어집니다.

<묏비나리>는 백기완 선생이 1979년 ‘YWCA 위장결혼사건’을 주도했다가 보안사 대공분실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됐을 때였던 1980년 12월에 쓴 장편 시입니다.

백기완 선생은 민중의 지도자이기도 했지만 한국 문인들과 폭넓게 교류한 우리 말을 사랑하는 시인이었습니다.

백기완 선생이 남긴 유산이 많은데요. 그 중에서도 빛나는 것이 말, 우리 말입니다

선생은 우리 말을 정말 사랑하셨는데요. 처음 만들어 제안해준 말들도 많았습니다. 새내기, 동아리 같은 말이 백기완 선생이 처음 만들어 쓴 말이었습니다.

#2 광주를 기리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

한 때 임을 위한 행진곡을 백기완 선생이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이 노래의 가사가 백기완 선생의 시에서 한 부분을 따왔기 때문에 생겨난 오해였습니다. 그러니까, 가사는 백기완 선생이 원 저작자인 거죠.

그럼 지금부터 노래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982년 2월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영혼결혼식이 열립니다. 5.18광주항쟁 당시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 열사와 들불야학을 창립해 노동자 야학을 주도하다 1978년 숨진 박기순 열사를 기리는 영혼결혼식이 열린 겁니다. 좀 자세히 들어가볼까요?

윤상원 열사는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당시에는 전라남도 광산군에서 태어나 살레시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 재학 중에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졸업 후에 서울 주택은행에 입사했다가 6개월만에 퇴사하고는 광주 광천공단의 한남플라스틱이라는 회사에 위장취업합니다. 이후에는 양동신협에 취업하고 노동자 운동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노동자 야학인 들불야학에서 일반사회를 가르치게 됩니다.

윤상원 열사를 야학으로 이끈 사람이 박기순 열사입니다. 박기순 열사는 1958년 전남 보성군에서 태어나 전남여고를 졸업하고 전남대 사범대학에 입학합니다. 1978년 7월에 광주 광천동 성당에서 동료들과 함께 노동자 야학인 들불야학을 설립합니다. 그해 10월부터 광천공단에 있는 ‘동신강건사’에 조립견습공으로 입사하는데요, 광주전남지역 최초의 위장 취업이었다고 합니다.

그 즈음 광주로 내려온 윤상원 열사에게 야학합류를 권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들불야학을 이끌고 가는 주역이었는데요, 박기순 열사는 1978년 12월 25일 야학당 난로의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학생, 동료들과 함께 산으로 나무하러 갔다 와서 수업에 참석한 뒤 밤늦게 귀가했다가, 새벽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숨졌습니다.

윤상원 열사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남겼습니다.

‘영원한 노동자의 벗 기순이가 죽던 날’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여
왜 말없이 눈을 감고만 있는가
두 볼에 흐르던 장밋빛
늘 서럽도록 아름다웠지….”

들불야학은 5.18광주항쟁에서 매우 중요한 조직이었습니다. 계엄군에 의해 광주가 완전히 고립되고 언론이 통제당했을 때, 윤상원 열사는 당시의 진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시민들을 규합하기 위해 들불야학 사람들과 함께 투사회보를 만들어 배포합니다.

그렇게 투사회보는 광주시민의 눈과 귀가 되었고 윤상원 열사는 광주 항쟁의 지도부인 민주투쟁위원회의 대변인을 맡게 됩니다. 그리고, 항쟁의 마지막날 윤상원 열사는 전남도청을 끝까지 지키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지게 됩니다.

1982년 2월 박기순 열사와 윤상원 열사의 영혼결혼식이 제안되고 망월동 묘역에서 영혼결혼식이 진행됩니다. 이 영혼결혼식에 끝나고 한 달 후 쯤, 광주지역의 문화운동을 하는 사람들 10여명이 소설가 황석영의 집에 모여 두 사람의 넋을 위로하는 노래극을 만들게 됩니다.

제목은 <넋풀이> - 빛의 결혼식이었습니다.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창문을 모두 담요로 가리고 오전에 대본과 노래를 짓고 연습까지 하고 통기타와 북, 꽹과리 정도를 들고 새벽까지 녹음기로 녹음했다고 합니다. 1박 2일동안 7곡의 노래가 담긴 노래극이 만들어지는데요, 그 노래극의 마지막 합창곡이 임을 위한 행진곡입니다.

이 노래는 1979년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받기도 했던 전남대생 김종률씨가 작곡을 했고 황석영씨가 책 한 권을 들고 와 백기완 선생의 시 <묏비나리>의 일부분을 가져와 가락에 맞게 다듬어서 노래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녹음된 노래극은 기독청년협의회를 통해 2천개가 비밀리에 복사돼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노래극을 만든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종률씨는 군대에 가게 됩니다. 그리고, 1983년 첫 휴가를 나와 신촌을 지나다가 연세대에서 울려 퍼지는 이 노래를 듣게 됩니다. 단 1년만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전국의 집회 현장에 울려퍼지게 된 겁니다. 그만큼 노래의 힘이 강력했던 것이죠.

그리고 지금까지 이 노래는 거의 모든 집회 현장에서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이명박-박근혜 시대, 노래마저 탄압당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고향은 광주입니다. 두 영혼을 기리는 곡으로 시작돼 광주영령을 기리는 곡이 됩니다. 그후로 지금껏 광주항쟁 기념식에서 제창돼 왔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정부 공식 행사가 되고 나서도 행사의 절정은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이었습니다. 정확하게는 1997년 5월18일이 광주민주화운동기념일로 제정되고 이때부터 정부 공식 행사가 열리게 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기간 내내 5.18행사에 참석했고 악보를 볼 필요도 없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은 이명박 대통령 집권 1년째인 2008년까지만 이어집니다. 2009년 행사부터 제창이 아니라 합창단의 합창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런 행사방식에 항의하며 당시 야당 의원들과 시민참가자들은 일어서서 팔뚝질을 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광주항쟁 관련 단체들은 정부 행사를 보이콧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로 이명박 박근혜 정권 10년동안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느냐 아니냐의 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광주항쟁을 기리는 행사에서 광주시민들이 원하는 노래를 정부가 거부하는 황당한 상황이 지속됩니다.

심지어는 극우단체들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북한과 연관돼 있다는 주장까지 나옵니다. 북한군 개입설과 뒤섞이면서 광주항쟁과 항쟁을 기리는 노래에 색깔론이 끝없이 제기된 겁니다.

마침내 정권이 바뀌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 이후 광주 5.18국립민주묘지를 찾아 윤상원 박기순 묘소에 참배합니다. 1982년 영혼결혼식이 열린지 15년 후인 1997년 두 열사는 광주 국립민주묘지에 합장됐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묘소에 참배한 것이죠.

그리고, 5월 12일 대통령이 직접 5.18기념식 제창곡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지정해 부르도록 국가보훈처에 지시합니다. 그에 하루 앞서 몇 년동안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논란을 일으켜왔던 박승춘 보훈처장을 경질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다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퍼지게 됩니다.

#세계 민주주의와 인권을 향한 운동의 노래가 된 임을 위한 행진곡

유튜브에서 찾아보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불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볼 수 있습니다. 가깝게는 2019년 홍콩 시위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는 장면이 보도되기도 했죠. 그 외에도 대만, 인도, 태국, 파키스탄, 캄보디아 등 여러 나라에서 이 노래가 불리웁니다.

사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 세상에 나온 이후 1980년대 초중반부터 아시아 각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1982년 한국과 홍콩의 운동권 학생들의 교류 과정에서 처음 외국에 알려졌고 홍콩 기독교 노동운동 조직에서 일했던 활동가가 영어 가사를 광둥어로 번역해 홍콩에 본격적으로 퍼져나게 됩니다. 당시 번역된 제목은 애적장전, 영어로 march for love 였습니다. 1985년에는 세계기독학생연맹이 주도해 한국의 노동운동 현장을 둘러봤던 인도, 홍콩, 필리핀, 파키스탄 활동가들이 이 노래를 배우고 각국에서 불렀다고 합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여러 나라에서 자기 언어로 바뀌었고 노래 제목도 다양하게 있습니다. 대만에서는 ‘노동자전가’라는 제목으로 1989년에 크게 확산됐고 캄보디아에선 1980년대 후반에 많이 불렸고 태국에선 1990년대 노동자밴드가 ‘연대’라는 제목을 붙여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중국에서도 2005년 신공인예술단이 ‘노동자찬가’라는 제목으로, 인도네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 표준어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고 합니다.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갔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노래가 처음 넋을 기렸던 박기순 열사와 윤상원 열사가 그랬고 1980년 광주를 지켰던 광주시민들이 그랬고 그후로 수십년간 민주와 인권,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 싸웠던 모든 이들이 그랬고 이 시를 쓴 백기완 선생이 그랬습니다.

민주와 통일, 진보를 위해 싸웠던 모든 열사들 이름도 남기지 않고 스러져간 모든 사람들 그리고, 백기완 선생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그 분들이 남겼던 뜨거운 맹세, 이제 산자의 몫이겠죠. 그 길을 따르는 것, 우리의 몫이 아닐까 합니다.

기사 링크 https://www.vop.co.kr/A00001549359.html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Jfygk-GyeG0&feature=emb_lo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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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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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김도 * 죄송하고, 감사하고, 잊지않겠습니다.
125 송민 * 정말 감사하고 영원히 잊지 않을께요
124 김시 * 당신들의 죽음이 헛 되지 않게 기억하겠습니다
123 조명 *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지켜내주어서 감사합니다. 아마 그때 막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독재정권이 유지됬을수도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지켜내주어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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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황인 *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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