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중항쟁사 보고 및 제37주년기념 선언
5․18민중항쟁사 보고 및 제37주년기념 선언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행사에 참석한 내외빈 여러분! 정말 감사드립니다.
위대한 우리국민의 촛불혁명은 마침내 민주주의를 구하고 대한민국을 ‘국가다운 국가’로 만들 새로운 정부를 탄생시켰습니다.
5.18 제37주년의 슬로건은 ‘촛불로 잇는 오월, 다시 타오르는 민주주의’입니다.
새 정부는 적폐를 청산하고, 5.18정신을 헌법전문에 넣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식 지정해 제창하며, 특별법으로 5.18왜곡행위를 막고, 5.18당시 발포명령자를 찾는 진상규명을 재추진하겠다는 공약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공약이 차질 없이 이행되기를 촉구하면서, 5.18민중항쟁사를 보고하고 5.18민주화운동 37년을 맞는 우리의 각오를 선언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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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했던 박정희 유신독재 체제가 부마항쟁에 이은 10.26사태로 붕괴되면서 그동안 억눌려 온 우리 국민의 민주화 요구는 폭발적으로 터져 나와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1980년 5월, 그 열망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집단은, 사전에 준비된 정권장악 시나리오에 따라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선포하여 전국의 대학 교정에 계엄군을 주둔시키고, 모든 정치활동을 중지시키며 전국 각지에서 민주인사들을 체포 구금함으로써,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좌절시키고자 하였다.
전국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민주화 일정을 추진하던 광주에서는, 5월 18일 오전 10시 전남대학교 정문에 모인 학생들을 시작으로, 계엄군에 맞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시작하였고, 공수특전단을 앞세운 계엄군은 초강경진압으로 학생들과 무고한 청소년, 시민들까지 살인적으로 유혈진압하기 시작했다. 공수특전단의 이러한 무자비한 폭력에 분노한 대학생, 회사원, 노동자, 아주머니, 아저씨, 고등학생까지 시위 대열에 합세하면서, 광주 시민들은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무력 진압될 때까지,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와 인권과 정의를 사수하기 위한 숭고한 항쟁을 벌였다.
목숨을 내건 시민들의 저항에 직면한 계엄군은, 광주에서 일시 퇴각하여 광주를 고립시키는 작전으로 전환하였으며, 광주는 일주일 동안 외부로부터 철저히 고립된 채 무정부상태에 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시민들은 고립무원의 상황과 죽음을 넘나드는 절박함 속에서도, 시내에 수천 정의 소총과 수만 발의 실탄 등 무기류가 풀려있었어도 단 한건의 폭행, 범죄, 도난, 사재기 등도 일체 없었고,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에 헌혈을 하겠다며 너나없이 병원 앞에 줄을 서고, 마을마다 밥솥을 걸고 누구나에게 주먹밥을 나눠 먹였다. 이러한 시민자치공동체는 광주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해 이루어낸 항쟁 공동체였고, 대동 공동체였으며, 진정한 의미의 나눔과 평화와 정의의 공동체였다.
그러나, 평화적 해결을 요구하던 항쟁 지도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계엄군은 5월 27일 새벽, 치밀한 작전 계획에 따라 탱크와 헬기를 앞세우고, 도청 일원에 무차별 총격을 가하며 유혈 진압함으로써 열흘 동안의 5․18광주민중항쟁은 좌절되었다.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신군부세력은 5.18광주항쟁을 ‘용공세력의 사주를 받은 불순분자들의 폭동’으로 매도하였고, 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은 감옥과 영창으로 끌려가고 직장과 학교에서 쫓겨나고 폭도로 내몰리고 공개 수배되어 전국 도처로 쫓겨 다녀야 했다.
그러나, 5.18 피해자들과 전국의 대학생, 국내외 수많은 민주시민과 단체들의 ‘5.18진상규명과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투쟁은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이어졌으며 각계각층으로 확산되면서 이 나라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 되고 이정표가 되었다.
1988년 비로소 국회에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청문회를 통해 광주항쟁의 진상과 폭력진압의 불법 부당성이 일부나마 밝혀지면서 ‘5.18민주화운동’으로 그 성격이 규정되었다.
1990년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고, 1995년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폭력진압을 ‘헌정질서 파괴 범죄 행위’로 공식 규정하였다.
마침내 1997년 4월 17일, 12․12군사반란과 5․18에 대해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면서 전두환, 노태우 등 92명을 ‘반란 및 내란, 내란 목적 살인죄’로 단죄하여 사법 처리를 하였다.
이와 함께 5월 18일은 국가기념일인 ‘5.18민주화운동기념일’로 제정됨으로써 5․18항쟁은 법적․제도적으로 명예를 회복하게 되었고, 매년 정부 주관 아래 기념식을 개최하고 있다.
그리고 5.18민주화운동과 그 정신은 오늘날 민주화운동의 세계적인 모범사례로 평가받음으로써 2011년 5월에는 5․18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물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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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국민여러분!
하지만, 지금까지도 5.18은 ‘북한군이 주도한 폭동’이라는 주장을 퍼뜨린 일당들과 그에 동조한 세력들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고, 전두환은 회고록을 통해 “자신은 5·18의 희생자”로 표현했으며 "발포 명령이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5·18에 관한 책임이 없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전두환의 특별사면이 국민화합과 역사바로세우기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과 폄하에도 불구하고 5.18 민주화 운동이 우리민족과 세계가 지향해야 할 자랑스러운 역사로서 길이 계승 발전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함께 할 것을 약속드리며 경과보고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 5월 18일
5.18민주화운동 제37주년 서울행사위원회 집행위원장 최병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