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광주와 함께했던 대구·경북 학생운동
[시사인 676호 2020.09.05]
“광주 5·18항쟁 전 전국의 민주화 투쟁 열기는 서울-대구-광주 순서였다. 전두환은 자신의 고향도 제압하지 못하고 어떻게 정권을 찬탈할 수 있겠느냐며 대구·경북을 철저하게 봉쇄했다.”
지난 7월18일 광주광역시 운정동의 국립 5·18민주묘역에 대구에서 온 한 주검의 위패가 봉안됐다. 주인공은 경북대학교 역사교육학과 80학번 권순형씨(2018년 3월 작고. 향년 58세). 이날 대구·경북에서 온 참석자들은 권순형씨의 유해가 뿌려진 경북 의성 지역의 흙을 담은 유골함과 권씨의 위패를 들고 있었다.
권순형씨는 경북대 1학년 재학 중이던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에서 저지른 5·18 학살 만행을 실시간으로 대구 지역사회에 알린 혐의로 계엄군에 붙잡혔다. 그는 보안사와 경북경찰청 대공분실을 오가며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회복할 수 없는 정신장애를 입었다. 장애 상태로 풀려난 뒤 군대에 강제징집까지 당했다. 하지만 도저히 군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신이 망가진 그를 군에서는 ‘의가사제대’시켰다. 권씨는 그날 이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한 채 평생 어머니의 돌봄 속에 지내야 했다.
2003년 노무현 정부 들어 ‘5·18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 관련법이 개정되면서 권씨는 비로소 주변 동지들의 도움으로 5·18 관련 부상자로 인정받아 보훈처에 유공자 등록을 마쳤다. 이때부터 근근이 병원 치료는 받을 수 있었지만 2014년 곁에서 돌봐주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뜬 뒤에 행방이 묘연해졌다. 2018년 3월7일, 권씨는 대구시 외곽에 자리한 한 연탄공장 옆 자취방에서 홀로 지내던 중 쓸쓸히 숨을 거뒀다. 고독사한 권씨는 사망한 지 열흘이 지나서야 발견됐다. 형제들은 권씨의 유골을 화장해 경북 의성에 있는 부모님 산소 곁에 뿌려주었다. 그러다가 올해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정식 절차를 거쳐 광주의 품에 안겼다. 1980년대 초 권순형씨와 함께 대구·경북에서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맞서 투쟁해온 지역 민주화운동 동료들이 적극 나선 결과였다.
대구·경북에서 광주 5·18민주화운동에 직간접으로 연루돼 신군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한 이들은 수백 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유공자로 인정받은 대상자는 76명이다. 대부분 5·18구속부상자회 대구·경북지부에 소속돼 있다. 그 중심에 고 권순형씨의 경북대 선배인 이상술 상임대표(65)가 있다. 이 상임대표는 1970년대 말~1980년대 대구·경북 학생운동의 주역이다. 당시 권순형씨 등 후배들과 광주 5·18 학살 만행을 대구 시민들에게 알리다 전두환 신군부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당한 역사의 산증인. 이 상임대표는 “늦었지만 권순형 동지의 위패를 5·18민주묘지에 모실 수 있어서 다행이다. 대구·경북의 민주화운동 역사에 대한 인식을 바로 세우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1980년 대구의 봄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해 시민과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를 유혈 진압할 무렵 대구의 사정은 어땠을까? 경북대 복학생으로 시위를 주도하던 이 상임대표는 ‘80년 대구의 봄’을 이렇게 기억했다. “광주 5·18항쟁 전에 전국의 민주화 투쟁 열기는 서울-대구-광주 순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구의 민주화 열기는 뜨거웠다. 그래서 전두환이 자신의 고향에서마저 학생 시위를 제압하지 못하면 정권을 어떻게 찬탈할 수 있겠느냐는 강박으로 오히려 대구·경북을 철저하게 사전 봉쇄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부터 충돌도 심했다고 기억한다.”
실제로 당시 신군부는 1980년 5월15일 전국 최초로 대구·경북 지역 대학들에 휴교령을 내렸다. 도화선은 5월14일 대구의 격렬한 학생 시위였다. 영남대생들은 맨발로 경산과 대구를 통과해 대명동 캠퍼스까지 진출했다. 계명대와 경북대생들은 시내 대구백화점 앞에서 가두 농성을 벌였다. 같은 날 서울에서 이른바 ‘서울역 회군’으로 불리는 민주화 시위 소강상태가 전개된 것과 전혀 다른 양상이었던 셈이다. 대구백화점 앞에 모인 대구·경북 지역 학생 8000여 명은 ‘전두환 퇴진, 비상계엄 철폐’를 외치며 평화적인 가두 농성을 했다. 신군부는 초긴장 상태였다. 5월14일 자정, 전국 최초로 대구 지역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경찰과 계엄군이 학생 시위대를 급습해 무자비한 진압과 체포에 나섰다. 시내에서는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군인들에게 붙잡힌 학생 수백 명이 50사단으로 끌려가 구금됐다.
대구 시위의 강경 진압을 시작으로 전두환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발표했다. 치밀한 쿠데타 계획에 따라 1980년 서울의 봄을 주도하던 전국 대학의 학생운동 지도부는 일제히 검거됐다. 이 상임대표는 당시 대구에서 한창 열기가 고조될 때 ‘서울역 회군’ 소식을 듣고 답답했다. 그는 대구·경북 지역 대학생 대표와 함께 상경했다. “서울대 복학생투쟁위원장으로 있던 김부겸씨를 만나 향후 전망과 대응 방안을 물었다. 신군부가 강경 노선으로 학생 시위를 진압하고 지도부를 검거할 것이니 철저히 대비하라고 조언하더라. 5월16일, 대구로 내려오니까 계엄령도 공포되기 전인데 경북대에는 군인들이 이미 진을 치고 있었다. 상당수의 학생 시위 지도부가 군인들에게 검거돼서 50사단으로 끌려간 뒤였다.”
수배 상태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혼란스러웠던 이 상임대표는 평소 경북대 학생운동 지도부가 비밀 아지트로 삼던 시내 주점 ‘곡주사’에 갔다. 주점 안주인은 가창에 있는 피신처를 소개했다. 그곳에서 체포를 면한 대구·경북 학생운동 지도부 10여 명과 합류했다. “비상계엄 확대와 김대중씨 체포, 학생운동 지도부 체포 등 살벌한 조처가 발표되니 한군데 모여 있으면 안 되겠다 싶었다. 5·17 비상계엄 확대 이후 일제히 흩어졌다. 상당수는 군경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 체포되었다.”
이 상임대표, 경북대 선배 이형건과 이윤기, 후배 권순형 4명이 조를 이뤄 대구 시내 자취방에 숨어 지냈다. 광주에서 계엄군이 시민·학생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있다는 참혹한 소식이 속속 들어왔다. 당시 대구와 광주의 민주화운동 진영은 ‘양서조합’이라는 이름으로 물밑 교류를 활발히 벌이고 있었다. 사회과학 전문서점을 매개로 서로 지역 민주화운동 소식과 정보를 교류하고 친분을 나누는 운동권 네트워크였다. 광주학살 참상은 실시간으로 이 양서조합 네트워크를 통해 대구 운동권에도 전달됐다. 광주 참상 소식은 대구에 은신한 운동권 지도부에 큰 충격이었다.
“지도부가 모두 잡혀간 상태이지만 우리만이라도 대구 시민에게 광주의 참상을 알리기로 했다. 광주항쟁 기간 내내 들어오는 소식을 등사지로 밀어 4명이서 야밤에 시내로 나가 주택가와 공중전화 박스 등에 20~30장씩 몰래 뿌리고 다녔다.”
이들의 활동으로 인해 계엄 당국의 감시와 검문은 더욱 살벌해졌다. 대구의 재야 운동권 내에서도 광주 참상을 실시간으로 대구 시민에게 알리려는 노력이 여러 방면에서 전개되었다. 그해 5월26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입을 계기로 5·18민주화운동이 무참히 짓밟히자 이상술 그룹은 더 이상 대구에서 공개 활동을 벌이기가 어려워졌다. 이 상임대표는 선배 소개로 대구시 외곽의 속칭 새방골에 있는 알루미늄 새시 가공공장에 노동자로 위장취업해 지냈다.
그 무렵 이 상임대표의 집안은 풍비박산나기 직전이었다. “6월 말 은신처에서 오랜만에 집에 전화를 했더니 난리가 났더라. 형도 끌려가고 삼촌도 끌려가고. 집에서는 ‘너 때문에 집안뿐 아니라 친지들 다 망한다’고 원망했다. 그때 우리 형은 국민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었는데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교사직에서 쫓아내겠다고 위협했다더라. 권오국이라는 친구의 경우, 합동수사본부(합수부)가 집까지 찾아가 위협하는 바람에 모친이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 결국 내 발로 경찰서를 찾아갔다.” 자진 출두한 그는 이후 두 달 동안 50사단 등 대구 인근의 군부대로 끌려다니며 무수한 고초를 당했다.
전두환 신군부는 기어이 대구에서 ‘두레 사건’을 터트린다. 두레 사건은 광주 5·18민주화운동 직후 신군부가 대구 지역의 양서 보급 및 양서 읽기를 취지로 뜻을 같이한 두레양서조합 조합원을 중심으로 학생·농민·교사·회사원 등 100여 명을 불법체포한 뒤 고문으로 만들어낸 간첩조작 사건이다. 1980년 6월 말부터 당시 전두환 합수부가 배후 수사를 진행해 9월11일에 표면화되었다.
당초 대구의 두레 회원들은 그해 5월17일(5·18 전날) 오후, 광주 YMCA 강당에서 개최하기로 되어 있었던 ‘함평 고구마사건 진상보고대회’에 참석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그런데 5월18일 아침, 비상계엄령 선포로 광주 행사가 무산되면서 대구를 떠나지 못했다. 이후 광주에서 공수부대의 만행이 본격화된 5월20일 오전부터 두레-광주 연락망을 매개로 학살의 실상을 속속 전달받았다. 두레 회원들은 5월22일부터 광주 참상을 알리는 유인물 ‘대구시민에게 고함’을 만들어 시내에 뿌렸다. 이들은 23일부터 대전과 인천 등지에도 각 교구 성당을 통해 광주 진상보고서를 전달했다.
대구와 광주의 ‘달빛동맹’
광주항쟁 기간 대구에서 민주화운동 진영이 벌인 지하 연대활동은 전두환 신군부에 눈엣가시였다. 신군부는 5·18 기간 대구에서 벌어진 연대 지원활동을 반국가단체 결성이라며 ‘간첩단 사건’으로 몰아갔다. 당시 두레 사건은 가톨릭농민회와 천주교 신자들이 다수 연루되어 김수환 추기경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1980년 10월6일 김수환 추기경은 전두환 합수부장과 만나 이 사건에 대해 담판을 지었다. 두 사람의 만남 뒤 두레 사건에서 반국가단체 결성 부문은 제외되고 광주 5·18민주항쟁 관련 부문만 기소가 변경되었다.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경북도경 대공사무실에는 100여 명이 불법 구금되어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30여 일씩 모진 고문 속에 수사를 받았다. 15일 이상 감금되어 수사를 받은 사람이 14명이었다. 이들 14명(곽길영·이석태·정동진·김병일·이상국·정상용·김영석·권영조·황병윤·서성교·김진덕·이동열·신중섭·정재돈)은 훗날 대구·경북 지역 5·18민주화 유공자로 선정되었다.
합수부의 강도 높은 ‘간첩 조작’ 수사에도 불구하고 대구·경북 지역에서 저항의 열기는 꺾이지 않았다. 1980년 2학기 들어 다시 경북대학교 내에 5·18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과 전두환을 비방하는 유인물이 돌았다. ‘예목 써클 백서 사건’으로 심창일과 김동욱 두 학생이 구속됐다. 광주학살 백서를 발간해 뿌린 혐의였다. 또 경북대 국문과 김종길·권용호 등 4명은 광주학살 참상을 담은 유인물을 살포하다 붙잡혀 구속됐다. 11월에는 경북대 편지 사건이 터졌다. 누군가 광주학살과 전두환의 만행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전 학과 우편함에 꽂았던 것이다.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 상임대표와 권순형·이윤기 등이 배후로 의심받아 보안사와 경찰에 끌려갔다. 이들은 경북경찰청 대공분실에서 2주일 동안 고문을 당했다. 국과수 필적감정까지 조작해 ‘범행’을 자백하라고 압박했다.
“발가벗겨서 손발 묶고 눈 가리고 다리를 누르고 발바닥 치면서 고문했다. 심지어 (문제의 유인물이) 내 필적과 동일하다는 국과수 필적감정서까지 들고 와서 보여주더라. 나중에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이 터졌을 때 ‘저 사람도 나처럼 당했구나’라고 생각했다.”
이를 악물고 견뎠지만 끝까지 버틸 수는 없었다. 나중엔 하지 않은 일도 했다고 부는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조작해서 만든 이야기가 무리라고 여겼는지 2주일 만에 이 상임대표와 이윤기·권순형을 불기소 석방했다. 모두 살아서 나왔다. 그러나 권순형은 참혹한 고문으로 돌이킬 수 없는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다. 평생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대구·경북 지역 5·18 관련 구속·부상자들은 상처가 깊다. 이들은 신군부 세력의 수뇌부가 대구·경북 출신이었다는 사실에 힘들어한다. 항일 독립운동, 2·28 민주화운동 등에서 중추 구실을 했던 대구·경북이 독재와 불의의 도시처럼 낙인찍힌 것을 부끄러워한다. 특히 대구·경북의 모든 시민들이 가해자 집단인 양 치부되어 명예가 실추되어온 사실이 개탄스럽다.
대구·경북 지역의 5·18 피해자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대구와 광주가 시민 차원에서도 화해하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달빛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대구시와 광주시 간에 진행되고 있는 교류와 연대에 대해선 지나치게 ‘지자체 간의 정치적·행정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고 본다. 대구·경북 지역의 5·18 피해자들은 시민적 차원에서 진정한 화해와 연대를 실현함으로써 양 지역의 진정한 통합과 발전을 촉진하는 데 기여하겠다며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해마다 대구에서 자체적으로 여는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행사도 그중 하나다. 또 대구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일베 세력 등의 5·18 왜곡 폄훼 행위에 대항한 소송전도 벌이고 있다. 이 상임대표는 이렇게 마무리했다. “5·18 민중항쟁을 은폐하고 기만으로 왜곡하는 이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 전두환 군사 세력은 여전히 반성하지 않고 있다. 우리 대구·경북 5·18 피해자들은 끝까지 광주를 기억하고 연대해서 싸울 것이다.”
5월 광주와 함께했던 대구·경북 학생운동 - 시사IN (sisain.co.kr)